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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강만길 선생 1주기 추모 학술회의: 식민사학과 분단시대 극복을 위한 민중 지향 역사학 본문
강만길 선생 1주기 추모 학술회의: 식민사학과 분단시대 극복을 위한 민중 지향 역사학
지난 6월 21일, 본교 국제관에서는 강만길 선생(이하 강만길) 1주기를 맞아 추모 학술회의가 열렸다. 강만길의 연구범위가 중세사와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만큼, 이날 회의에는 한국의 중세사 및 근현대사 연구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강만길 역사학의 방법과 지향 그리고 현재적 의미에 대해 다각도로 논의했다. 본 학술회의에 참석한 여러 연구자들이 보여준 것처럼, 강만길의 역사학은 지금도 재해석을 통한 사학사적 자리매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식민사학 극복이라는 문제의식, 한국사에서의 ‘분단시대’라는 규정, 그리고 민중을 역사의 분명한 주체로 호명하는 일관된 지향은 당대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으로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학술회의는 엄혹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격동의 현대사를 살면서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맞서온 거인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는 첫걸음이었다. 본지에서는 발표 중 일부를 뽑아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식민사학 극복을 위한 상공업사 연구의 사학사적 의미와 재해석
첫 발표자인 최주희는 강만길의 초창기 연구분야였던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에 대한 재해석의 방향을 제시했다. 강만길의 역사연구는 해방 이후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역사학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실천적 학술 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최주희는 강만길이 유년시절 식민지 억압의 일상을 경험하고, 해방 이후 남북분단의 긴장 속에서 청장년 시절을 보내면서 역사학이 직면한 시대적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는 학문적 여정을 밟았다고 보았다. 강만길은 자신을 비롯한 2세대 연구자들의 목표는 식민사학의 타율성론과 정체후진성론을 극복하는 데 있었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는데, 그 첫 결실이 ‘자본주의 맹아론’(이하 자맹론)의 관점에서 조선시대 경제사를 연구한 논문들이었다는 것이다.
최주희는 방법론으로써의 자맹론에 대한 이정철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자맹론 독해의 사학사적 의미를 분명히 하였다. 자맹론의 틀이 더이상 진실성을 담보하지 못하게 되었더라도, 해방 이후 자맹론의 방법론적 대두에 있어서 그 본질적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가 아닌, 식민지 극복 문제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만길이 취했던 자맹론은 현재도 식민사학 극복의 ‘방법론’으로써 이해될 필요가 있다. 강만길은 ‘자본주의 이행논쟁’ 중 폴 스위지(P. Sweezy)의 입론에 따라 조선후기에 나타난 상인 메뉴팩쳐의 양상을 확인했다. 이는 식민사학, 특히 정체성론에 대항하여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에 따라 한국사의 발전상을 설명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기원을 조선후기 경제구조 속에서 도출해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조선전기 관영수공업을 다룬 석사학위 논문과 후속 논문을 거쳐, 봉건사회 해체기에 해당하는 조선후기에 나타난 국역(國役)의 고립화(雇立化)경향, 도고상인에 의한 상인 메뉴팩처의 검출로 결실을 맺었다. 물론 오늘날 여러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자맹론과 같은 목적론적 역사발전론에 의거한 논의는 설득력을 잃었다. 이에 최주희는 “최근에는 그의 입론을 따르는 연구들이 거의 발표되고 있지 않지만”, 강만길이 ‘실증’한 상공업의 발달이라는 측면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재해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재해석과 관련하여 우선 최주희는 강만길이 실증한 매뉴팩처의 방식이 서울의 시장과 광산지역 등에서 일부 확인될 뿐 농촌 장시 일반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점을 지적했다. 이어서 강만길이 근거했던 법전류의 조문을 재해석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요컨대, 16세기 들어 중앙정부는 관영수공업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역 동원방식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양란 후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여 장인들을 공물, 역가 지급체계에 포함시킴으로써 국가행정과 왕실의례 및 군사방어를 위한 국가 수공업 및 광업의 틀을 유지해갔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강만길이 주목한 조선후기 관장제의 붕괴와 사장의 대두는 국역체제의 재편이라는 큰 틀에서 재해석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발표자는 조선후기 고립제의 확대도 이같은 맥락에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부역제의 고립제로의 변화는 국가의 중세적 인신지배가 조선후기 탈각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지점”이므로, 고립제의 확대 과정을 밝힌 강만길의 연구는 탁월한 성과로 평가했다. 다만 발표자는 조선후기 고립제의 정착이 곧 국역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고립제를 통해 국역 편제의 효율화를 꾀할 수 있게 된 것으로 파악했다. 즉, 강만길이 조선후기 수공업과 임노동 분야에서 목도한 ‘해체’의 징후는 “왕조질서의 ‘재편’으로서 이해할 만한 요소들이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 국역체제의 재편 속에서 왕조의 필요에 의해 성장한 특권적 도고상업의 존재양태 역시 ‘재해석’의 대상임이 확인되었다. 이제는 조선후기 상공업사 연구는 강만길이 논증하였던, 도고상인들이 축적한 상업자본의 ‘맹아’를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도고의 특권을 혁파하는 통공 조치가 18세기 후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후 사상도고의 매점 행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 이유를 구명할 필요가 있다. 발표자는 더 나아가서 그 후속 효과가 근대이행공간에서 어떻게 변화되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토론자인 김미성은 봉건사회의 ‘해체’가 아닌 국역체제의 재편이라는 최주희의 재해석 입론에 대해 전체적으로는 동의하면서도, 국가의 입장만을 나타내는 ‘재편’ 내지 ‘동원’ 이라는 시각의 일방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상인들이나 장인들의 입장을 나타낼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분단시대 극복을 위한 민족통일전선 운동 연구와 국가주의 비판
본디 조선후기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강만길이 학문 방향성이나 전공 분야를 근현대 시기로 초점을 맞추게 된 계기는 당시 사회상과 연관되어 있었다. 여러 발표자들이 거듭하여 확인하여 주듯이, 강만길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 크게 고무되었지만, 얼마 후에 들어선 ‘유신’은 큰 고민을 안겨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강만길 역사학은 일종의 민족주의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받아들여진다. 발표자 홍종욱에 따르면 그 핵심은 국민주권, 국민혁명, 민족통일로 정리된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과 그 이후 강만길의 연구의 목표는 민족통일전선 연구를 매개로 한 분단극복사론의 수립이었다. 그 내용은 식민지 시대 민족해방운동을 좌우분열이 아닌 민족통일전선의 확립을 위한 과정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강만길의 민족통일전선 연구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가다듬어졌다. 홍종욱은 이 시기 강만길의 연구에서 좌우의 대립을 근대민족국가 수립운동과 통일운동의 기반으로 이해하는 등, “극심한 좌우대립의 역사에서 분단극복의 논리를 이끌어내는 변증법적 낙관적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홍종욱에 따르면, 강만길은 1920년대의 신간회, 1930년대 민족혁명당으로 이어지는 민족연합전선의 흐름을 중시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해방 이후 역사에 대해 강만길은 좌우합작운동 역시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였다. 이는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1991)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특히 강만길은 1930년대 반(反) 파쇼 전선의 흐름에 발맞추는 세계사적 보편성 위에 있다고보았다. 요컨대 발표자는 강만길이 ‘통일전선’ 개념으로 1920~1930년대 국내외 민족운동의 흐름을 체계화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강만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 조선건국동맹 등이 상호협동을 추구한 점을 조명했으며, 해방 이후에 대해서도 남북협상에 주목해서 식민지 시기의 통일전선운동이 해방 이후 민족국가 건설로 이어지는 흐름을 중시하였다. 8·15 공간에서의 좌우합작운동도 민족운동의 범주에 포함하였고 1948년 남북협상은 이승만과 한민당계열을 제외하고 모두 합류했다고 평가하였던바 이러한 움직임은 식민지 시기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경험 위에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만길의 역사인식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특정계급의 헤게모니를 강조하는 방식의 통일전선론을 상대화하는 한편, 식민지 시기 민족해방운동이 그 방향성에 있어서 전선 전체의 통일을 보다 우선시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민족통일전선 운동의 흐름을 중시하는 시각은 대표적인 개설서인 『고쳐 쓴 한국현대사』(1994)에도 이어졌으며, 오늘날의 한국근현대민족운동사 연구 및 교육의 틀을 확립하였다고 평가하였다.
한편, 홍종욱은 오늘날 민족주의가 국가주의의 재래(再來)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강민길의 민족주의에 다시 주목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1919년 임정법통론, 뉴라이트 계열의 1948년 건국론의 대립이나 ‘대한민국 민족주의’와 같은 현상은 국가의 정통성을 따지거나 발전지상주의를 추구하는 퇴행적 모습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강만길의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주목되는 것은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다. 홍종욱은 강만길이 “민족주의를 외세에 대한 저항으로만 국한하지 말고 본래적 의미로 인민주권주의로 파악할 것”을 주장했음을 환기하며, “강만길 역사학은 남북한의 국가주의적 역사학을 비판하고 민중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역사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21세기 국가주의 재래를 비판할 수 있는 시좌를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요컨대, “인민주권이 없는데 노면전차만 다니면 되는 것인지 물었던” 강만길의 고찰은 오늘날 당면한 국가주의의 도래에 대한 비판이자 “민주주의, 인권, 생태, 환경 등에 큰 관심이 없는” ‘진보적 역사학’에 대해서도 성찰의 기회를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민중이 주인되는 역사, 그리고 통일시대에 대한 준비
강만길의 역사학의 또 다른 특징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분명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강만길 역사학에서의 민중에 대한 조명은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1987)(이하 『생활사』)을 다룬 남기현의 발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남기현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민족·민주·민중 선언’에서 ‘민중’이 독재정권 아래 수탈당하는 존재로 제기된 이래, ‘소외된 피지배층’이라는 의미로 지식인들에 의해 호명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생산계층이면서도 피지배층이자 소외계층으로 존재하며 권력에 저항하는 주체로서 민중을 재발견”했던 것이다. 특히 빈민에 관한 관심은 강만길이 해당 저서를 집필하는 1980년대 상황과도 연결되었다. 강만길의 『생활사』가 집필된 1980년대는 도시 빈민 문제가 대두되어 한국 지성계에서 ‘민중’이나 ‘빈민’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던 때였다.
한편, 강만길이 특히 한국사상의 ‘민중’에 주목하게 된 것은 서구의 자본주의 이행과정을 도식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과 관련이 깊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강만길은 식민지 상황에서는 서구식 민족 부르주아지는 물론 프롤레타리아트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으므로 양자는 식민지하에서 독자적으로는 민족운동을 주도하지 못한다고 보고 이들을 대신하는 주체로 ‘민중’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강만길이 파악한 일제하 민족운동은 곧 ‘민중민족운동’이었다.
한편, 이러한 인식하에서 일제하 ‘민중’은 계급연합적 성격이 중시된다. 강만길은 일제시기 민중의 특징과 속성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먼저 일제시기 민중은 식민 통치 아래서 그 피해를 직접 받는 피지배층이었다. 식민지 지배권력과 타협한 세력은 민중 범주에서 제외되었다. 예컨대 부일적(附日的)이거나 타협주의적인 자산계급 및 넓은 의미의 지식인층은 제 외 된 다. 다음으로 일제의 식민 통치의 피해를 받았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세력이 민중의 핵심을 이룬다. 그 범주를 살펴보면,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중심의 정치인과 반일적 지식인이 해당한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는 농촌 빈민, 화전민, 토막민, 공사장 막일꾼 등의 ‘빈민’이 바로 ‘민중의 모체’이다. 남기현에 따르면 강만길이 포착한 빈민은 “식민지배의 소산물”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일반적 성격에 식민지라는 현실이 중첩되었을 때 대거 양산되었다는 점에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표상하는 존재들이다. 요컨데 발표자는 『생활사』를 강만길이 민중의 생활세계를 포착하고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변혁주체로서의 가능성’을 읽어내려는 결과물로 평가하였다.
토론자 양지혜는 발표문의 제목이기도 한 “의식 있는 민중”이라는 틀의 현재성에 대해서 질문했다. 『생활사』가 쓰인 시대적 조건을 고려하더라도, 현재의 관점에서는 두 가지 방향으로 민중의 범주를 재검토하고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첫째,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것이다. 양지혜에 따르면 강만길의 ‘민중’ 범주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다소 제한적이다. 여성·장애인·이주민인 빈민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빈민’의 기본값은 조선인·청년·남성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의식 있는’이라는 전제조건을 재검토하는 것이다. 토론자는 강만길의 ‘민중’은 언제나 ‘피해자이거나 저항가’로, 식민지배에 공모한 지식인이나 빈민은 식민지에서 살아간 존재임에도 ‘민중’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민중은 해방 이후 현대사의 주체로도 꾸준히 호명되었다. 특히 강만길의 통일담론의 변화를 다룬 한모니까의 발표 <강만길의 시대 인식과 통일담론의 변화> 에서도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도 강만길이 역사적 주체를 민중으로 보았다는 점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런 한편, 한모니까는 토론과정에서 “1990년대 말부터는, 특히 6·25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기대”했음을 언급하면서 통일의 주체로서 포괄적인 ‘민중’에서 특정 ‘세대’로 변화했음을 논하기도 하였다. 한편, 포괄적 ‘민중’에 대한 낙관적 기대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강만길의 역사 인식과 실천적 학문활동: 과거사 청산론(운동)을 중심으로>에서 강만길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활동을 다룬 이세영은 “과거사 청산문제야말로 강만길의 양대성과인 식민사학과 분단사학 극복을 결합하는 주제”임을 천명하면서 동시에 친일 청산문제 역시 “궁극적으로 한국과 일본,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시민/민중’의 연대 속에서 장기간에 걸쳐서 이루는 것”이 강만길의 민중 지향의 사론에도 부합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강만길 역사학에 대한 논의에서 거듭 확인되는 확고한 민중 지향은 ‘분단시대’라는 문제의식이 지속되는 가운데 현재까지도 역사학이 나아갈 길에 대해 실마리를 주는 역사의 ‘주체’로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정리 : 천관우 기자 kw10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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