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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문화 형성기 한국문학/문화사의 재인식 : 일본 제국 해체와 코리안 문화의 분기를 중심으로 본문
냉전문화 형성기 한국문학/문화사의 재인식 : 일본 제국 해체와 코리안 문화의 분기를 중심으로
1989년 구소련권의 붕괴를 계기로 탈냉전이 선언되자, 냉전 ‘이후’의 질서를 모색하려는 논의가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의 지식계 역시 이 추세를 받아들여, 제국 일본의 침략전쟁·식민지배에 대한 반성 및 성찰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처리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과 한국전쟁이 정식으로 종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자, 동아시아의 여러 비판적 지식인들은 냉전체제 시스템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깨닫고 그 시스템 내부의 역학관계를 밝히고자 힘썼다. 미·소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냉전의 기본 틀을 벗어나,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만들어진 국민국가 체제와 동시적으로 발생한 냉전의 구조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그 안에서 주변국들이 정치·사회·문화적으로 교차하는 양상을 살피고자 했던 것이다. 2000년대 이후 냉전아시아, 냉전문화 등 냉전의 주변부로 간주되었던 지역, 국가, 분야 등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었던 것도 이러한 영향 하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신냉전의 불안정성을 절감하는 현재에는, 냉전의 역사와 그 사이 한국의 냉전화의 결합관계, 전 지구적인 문화냉전, 북한의 맥락을 더하는 등 한층 더 풍부하고 정교화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달 13일 성균관대학교에서도 이러한 냉전기 한국문학/문화사를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 각지의 연구자들이 모였다. 이에 본지에서는 이 날 진행되었던 발표 중 일부를 뽑아 소개해보고자 한다.
냉전형성기 일본연극과 조선연극의 재회
한국과 일본의 연극 교류의 흐름은 해방 이후 약 30년이 지난 1970년대가 되어서야 생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2년 일본 상황극단(状況劇場)이 <두 도시 이야기>라는 작품을 한국에서 공연하면서 첫 걸음을 내딛었고, 이 시기 일본의 아방가르드 극작가 가라 주로(唐十郞)와 김지하 간의 친분으로 두 나라 사이의 연극계가 만나게 되었다. 1979년에는 박정희와의 친분이 있었다고 알려진 후쿠다 쓰네아리(福田恆存)로 인해 극단 ‘스바루’의 한국 공연이 허가되었고, 1980년대에는 극단 68/71이 김지하의 연극을 올리며 아시아의 연극, 그리고 ‘민중’의 연극을 표방했다. 1980년대 이후부터 한일연극교류협회가 창단하며 교류가 체계화되는데, 한국 극단 청년단이 방일하여 한국어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남한에서는 해방 직후, 즉 냉전형성기 교류의 흐름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데, 과연 북한과 재일조선인 연극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발표자 김모란은 아직 크게 가시화되지 않은 1950년대의 북·일 연극교류의 궤적을 좇아가며 그 문화사적 의의를 밝히고 있다.
냉전형성기 북한과 남한의 연극교류는 당시 좌파 계열 및 일본공산당원으로 구성되었던 ‘일본신극인단’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핵심 멤버로는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히지카타 요시(土方与志), 우노 주키치(宇野重吉), 스스키다 겐지(薄田研二), 오가쿠라 시로(岡倉士郎)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1957년 중국과 북한을 차례로 방문하고 『테아토로』라는 일본 연극지에 그 감상을 기록했다. 『조선예술』, 『로동신문』, 『민주조선』 등 북한 매체에서도 일본신극인단의 방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발표자는 이 1957년의 방북은 제국/식민지 해체 후 최초의 집단적 재회이고 이 사건을 시작으로 북·일의 교차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 신극인 대표 격인 무라야마 도모요시는 이전부터 조선(북한)에의 귀화 열망을 드러냈으며, 북한연극계도 그런 그를 모티프로 한 「일본인들」이라는 작품을 쓰기도 하는 등 긴밀한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무라야마의 독특한 이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조선 연극단과의 재회 및 조선·일본 간의 교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 최초의 재회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먼저 일본신극인단의 방북은 북한 측의 초청을 계기로 추진된 것이었다. 미국의 군비강화와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되어가는 현안에 대응하여 일본 인민들과의 교류·연대에 힘을 쏟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일본은 서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예술 부문 학생들이 귀국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재일조선인 예술 단체들의 활동을 방조할 것을 기약하고 조·일 예술 교류의 촉진을 위한 상설기관을 설치할 것을 합의했다. 『민주조선』은 조선대외문학연락협회 대표와 일본신극대표단 간의 합의서 내용을 공개했으며, 일본에 조선의 문화적 통일, ‘꿈같은 사회’ 건설을 선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건설’과 ‘합작’의 외침에는 귀국사업(북송)이라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과 일본의 문화인들은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 그와 관련된 서적과 자료까지도 공유해 나가며 ‘합작’을 해 나갈 미래를 상상했으며, 서로를 매개로 아시아 민주주의의 성장과 세계평화를 실현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러한 흔적들은 일본신극인단의 방북기(記)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북한에 간 일본신극인단은 개성의 국립극장 및 야외극장을 견학하고, 국립민족예술극장의 창극 <심청전>을 관람했다. 연극에 대해서는 ‘온실적인 느낌’의 중국 연극과 비교해서 ‘기개’와 ‘박력’이 느껴진다고 평했으며, 대부분이 ‘생생한’ 인상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다만 주목할 것은 연극에 대한 언급보다 해방 전부터 알고 지내던 조선 연극인들과의 재회에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가 더 많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일본신극인단이 방북 시 만난 북한의 문화인들은 안막(대외문화연락협회 부위원장), 최승희(최승희무용단 단장), 박팔양(작가동맹 부위원장), 신고송(국립극장 총장), 김일영(국립극장 장치가), 황철(인민배우)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이들 중 몇몇과는 해방 이전부터 문화적 교류를 한 것으로도 보인다. ‘반가운’ 조선 연극인들과의 만남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으며, 무라야마는 그에 대한 마음을 『민주조선』에 「열 두해 만에 보는 조선」이라는 글로 직접 형상화하기도 했다. “황철은 남은 한 팔은 무대에서 쳐들고/최승희는 어깨를 흔들며 춤을 뽑는다/곤색 세라복을 입은 무용 학교 학생이며/회색 제복을 입은 연극 학교 학생들의 한창 젊은 얼굴들의 명랑함이란!/그러면 다시 만나는 날까지/대동강이여!” 무라야마의 글에서 엿보이는 일본신극단과 조선 연극인들 사이의 연대의식은 냉전적 대립구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북한과 일본, 더 나아가 아시아 인민들을 잇는 새로운 관계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보다 평등한 입장에서의 연대를 도모하고, 인민대중이 모두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평화적인 미래를 전망하고자 했던 것이다.
문학을 통한 국제 연대 – 해방 후 문학자대회(1946)와 전쟁 후 작가대회(1953·1956)를 중심으로
1945년 8월 해방 직후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했던 좌우 문학인들은 ‘하나의 민족문학’을 성립하기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이러한 노력은 1946년 2월 8일부터 9일까지 이틀 동안 진행된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이하 문학자대회)로 결실을 맺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열린 문학자대회는 카프(KAFP)의 연장으로 인식되면서 이른바 좌익계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자들의 회합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해당 대회를 계기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은 카프계로 알려진 인물들 외에도 벽초 홍명희를 비롯하여 이태준, 이원조, 안회남, 김기림, 정지용, 이병기, 김광균 등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다시 말해, 해방 직후 대립되었던 좌우의 통합을 선포한 것이 본 문학자대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겨우 마련된 회합과 ‘하나의 민족문학’의 가능성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 성립으로 인한 한반도의 분단은, 민족문학의 분열 또한 야기했기 때문이다.
분단 현실 속에서 한반도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화마에 휩싸이게 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하여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이후 북한에서는 정전을 전승(戰勝)으로 주장하며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시기를 전후 복구 건설기로 규정한 바 있는데, 이때 ‘복구’의 범위를 단순히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문화 등 전분야로 설정했다. 그 여파로 정전 직후인 1953년 9월 26일부터 27일까지 <전국 작가 예술가 대회>(이하 1차 작가대회)가 열렸고,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모여 당의 강령과 지침에 기반하여 조선문학이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당시 한설야의 보고를 통해 북한의 문학예술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력히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민족문학과 국민문학이라는 근대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에서 국제 사회와 연대 가능한 보편적 문학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1956년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제2차 조선 작가 대회>(이하 2차 작가대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북한의 문학예술이 여전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함을 밝혔다. 발표자 이예찬은 앞서 언급한 해방 직후의 문학자대회(1946)와 분단·정전 이후 두 차례 열린 작가대회(1953·1956)에 주목하여, 해당 대회들을 통해 서로 다른 ‘조선’의 문학적 지향을 살피고 당대 작가·예술가의 지향점이 어떻게 세계와 조우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었는지 분석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해방 직후 열렸던 문학자대회(1946)의 목적은 “일본 제국주의의 패퇴와 세계 민주주의의 승리가 조선의 문학에게 기여한 최초의 빛나는 성과”였음을 알리는 것에 있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열린 문학자대회를 개최하는 시점에서, 행사를 진행한 자들은 조선문학 그 자체보다는 ‘민주주의 세계’와 ‘조선문학’의 관계에 대한 강조를 앞세우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식민지기 일본 제국주의로 인해 조선문학이 황폐화되었고 그로부터 재건에는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그것은 이 문학자대회로 인해 가능할 것이라는 명확한 입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문학자대회는 해방 이후 새로운 정세에 맞는 조선문학을 만들어내기 위해 꼭 거쳐 가야 하는 것, 또 세계와 조우하는 하나의 통로로서 기능했던 셈이다.
국제사회를 열렬하게 의식했기 때문인지, 문학자대회는 각계 명사의 축사와 세계 각지를 향한 메시지를 낭송하는 것으로 막을 열었다. 벽초 홍명희에 이어 여운형, 니콜라이 티호노프(Николай Тихонов)의 축사가 전해졌으며 이후 각 기관 및 단체 명의로 문학자대회에 보내진 메시지가 이어졌다. 이에 화답하는 형태로 문학자대회 측은 세계 각국으로 일종의 ‘결의문’을 보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크게 식민지 조선에서 문학예술인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러시아-소비에트 작가들의 명단이 제시되고, 조선의 문학은 처음부터 러시아-소비에트 문학의 지대한 교훈과 영향 하에 성장했음을 밝히는 것 등으로 채워졌다. 소련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에 대한 감사 인사, 중국의 문화예술인을 향한 동지적 태도 등을 전하는 메시지들도 찾아볼 수 있다. 국제사회를 향한 동맹·연대 관계를 강조하는 이러한 면모야말로, 세계 속에 ‘조선’을 위치짓고 그와 맞닿는 문학을 지향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분단·정전 이후 상당한 변화가 포착되었다. 1차 작가대회를 계기로 북한 문학예술은 서구의 문학예술과 철저히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고전 민요, 속담, 전설 등 우리의 훌륭한 인민 창작과 문화 유산들을 광범하게 수집 정리하며 과학적으로 체계화할 것이며 우리의 선조와 선배들이 창작한 귀중한 작품들을 인민들 속에 보급하는 사업”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히고, “서구라파 문학예술에 대한 비굴한 굴종으로부터 우리 민족 고전을 경시하며 이를 타매하는 경향들과 견결히 투쟁할 것”임을 강조했다. 여전히 ‘세계’와의 연대를 이야기하지만 그 범주를 소련 및 중국,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야 등 공산주의 국가로 한정하고 있던 것이다. 2차 작가대회에서도 그러한 공산권 국가와의 연대가 더더욱 강조되며, 맑스-레닌주의적 미학 원칙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에의 ‘무장’만이 요구되었다. 1946년 문학자대회에서 언급되었던 세계 속 ‘조선’과 광범한 연대의식 등의 논의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세계를 가리켰던 그들의 언어 역시 소련을 위시한 몇몇 공산권 국가로 한정되었던 것이다. 이는 명백히 해방 직후 논의되었던 지향점과 다른 맥락 속에 놓이는 것이며, 세계와 국제 사이 ‘조선문학’의 위치성(정체성)을 설정하는 방식이 굴절되고 분열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급변하는 냉전체제 아래 남북은 결국 서로 다른 ‘조선’을 지향하게 되고, 그 다른 지향점을 외면하거나 때로는 부딪히면서 각각 서로의 문학사를 정립해 나갔다. 그들이 꿈꾸었던 해방 직후의 ‘국제연대’는 이제 각각의 문학사 안에 파편처럼 존재할 뿐이며, 이에 대한 연구가 추후에 더욱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 정리 : 조수아 기자 lovelove99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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