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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나’의 무게에 대하여 본문

2면/원우발언대

‘나’의 무게에 대하여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3. 15. 19:39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며 기기 건너편 소리의 응답을 기다리던 때는 아득한 과거에 묻혀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주파수를 찾아 헤매는 듯하다. 때로 그것은 나와 꼭 맞아떨어지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음악이나 영화, 또는 무언가 아직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으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대학원생에게 이런 탐색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단연 논문이 일순위로 손꼽힐 것이다. ‘나만의 글’을 찾아 완성하고자 하는 욕구는 곧 학위 논문의 작성과도 직결된다. 누군가는 아직 대상을 찾는 중일 수도, 어떤 누군가는 벌써 찾아내 본인의 보석으로 가공하는 과정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은 그러한 운명적인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나만이 완성할 수 있는 글의 원석을. 대학원생으로서의 고충은 그런 것이다. 반짝거릴 수 있는 것을 찾아 가공해 내는 것.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찾는 과정부터가 고난의 시간이다. ‘나의 글’은 대학원 생활 내내 벼리고 다듬어야 하는 ‘나’이자 언젠가 끝마쳐야 하는 나의 ‘적’임에 틀림없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했던가. 결국 탐색의 마지막은 언제나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나의 손에서 빛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기에.

예로부터 시인들이 자아 성찰에 깊이 빠져 있던 이유는 그것이 가치 있는 일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다.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찾아야 하는 ‘나’라는 존재는 현대에 들어서 그 무게가 비교적 가벼워진 듯하다. 대학원생의 생활고는 이미 수많은 매체에서 언급해 왔고, 더 이상 낯선 소재가 아니다. 나를 탐색하기는커녕 글 한 자 제대로 쓰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온전히 나에게만 매몰되어서 결실을 만들어 내는 시기는 지났다. 그것만으로도 글에 담아낼 수 있는 나를 일부 잃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단 현실만이 대학원생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고뇌 속에서 탄생시켰을 글을 어떤 이는 본인이 쥐고 있는 다른 것을 이용하여 손쉽게 획득한다. 때로는 다른 이의 것을 빼앗아 가지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 그것이 결코 빛나지 않음에도, 나에 대한 탐색을 전혀 하지 않은 가볍디 가벼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똑같은 것으로 돌아온다. 나에 대한 깊은 탐색을 거쳐, 그 과정을 글로써 만들어 낸 이만이 받을 수 있던 학위는 이제 더 이상 지난날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듯하다.

‘가난’이라는 단어는 본래 간난(艱難)으로부터 왔다. 지난(至難)과 같은 어려울 난(難)자를 사용한다. 가난과 지난은 어째서 일개 대학원생에게만 동시에 찾아올까.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대학원이 부여하는 자격을 가져간 이들은 학문의 장에 난입(闌入)하는 법만을 배운 무법자라고 칭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무법 행위는 대학원에서의 고찰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비유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명확하지 못한 글을 쓰는 것이 본인으로써는 상당히 오래간만의 일이다. 그러나 익명으로도 극명한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그 숨겨진 뜻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에 대해 동의하는 원우도, 동의하지 않는 원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가 생각해야 한다. 몇 사람이 저지른 잘못일지라도, 그것은 결국 내부인인 원생들에게 돌아온다. 외부인들이 대학원 내부의 신뢰도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순간부터는, 무법자의 가치가 아닌 ‘나’의 가치까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상아탑은 이미 색이 바래 버린 지 오래이다. 속세와 이보다 더 가까운 곳이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무법자들은 무구한 학자들에게 결코 대답을 돌려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침묵조차도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되지만, ‘특별한 권리’를 가지지 못한 대다수의 원생들은 침묵을 방패로조차도 쓸 수 없다. 강제된 방관자의 위치에서, 대학원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자리에서 다시금 지루한 과정을 밟아 가는 것뿐이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탐구하고 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도 새벽까지 불을 밝히고 고심하는 원우들이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현실의 부당함을 나는 때로 니체의 말로 포장해 보려 한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반드시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고. 지금의 혼돈은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니, 내가 품은 별이 화려하게 도약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부당함에 목소리조차 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기에 이름조차 밝히지 못한 작은 글에서 그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토로해 본다. 방금의 약소한 포장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부당함을 알고 있을 원우들에게 위로도 함께할 수 있었기를 바라며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