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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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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문학의 향기

여성의 탐미주의, 선구적 감각의 재편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4. 15. 13:22

여성의 탐미주의, 선구적 감각의 재편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백신애, <아름다운 노을>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작가정신, 2023.)

 

여타의 다른 윤리적/도덕적/정치적 타당성을 설득하지 않고 오로지 아름답다는 사실만으로(혹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사실 만으로) 존재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름다움은 인간을 기쁘게 하고 황홀하게 만들며, 인간에게 탐미란 거부할 수 없는 매혹처럼 느껴지곤 한다. 탐미주의는 예술의 정치적 정당성을 대타항으로 두고 예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자율성을 하나의 미학으로 주장하려는 반항적이고 전위적 시도 중 하나로 주창되었다. 탐미주의는 예술의 미학 한 가운데 놓인 정치성을 비판하되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한 기왕의 예술사조에서 멀어짐으로써 예술에 대한 새 미학적 기준을 제시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면 예술의 정치성을 드러낸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국 문학에서 탐미주의의 발생 또한 비슷한 경향을 따른다. 이때 주목하고 싶은 것은 기왕의 질서 혹은 기율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서 탐미주의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때 추구되는 아름다움은 무목적성의 그것이 아니라, 새로운 예술의 기율을 세움으로써 이전과 분별되는 문학의 미학적 정치성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여성 작가의 탐미주의는 특히 주목을 요한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유효한 비판을 수행하고 그것을 상대화함으로써 문학의 지향과 가치를 재편하려는 시도가 곧 새로운 시대의 질서를 선도하는 것이라 할 때, 시대 중심의 규율에서 끝없이 탈락된 존재로 호명되곤 했던 여성 작가의 존재야말로 그 끝없는 가치의 재편의 수행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1939~1940년 사이에 잡지 《여성》에 연재되었던 백신애의 소설 「아름다운 노을」을 탐미주의 탐문에 대한 감각 재편의 선구적 사례로 읽힌다. 이 소설은 작가인 ‘나’가 화가인 친구 ‘순희’를 우연히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구조를 취한다. 남편과 사별하고 열여섯 아들 석주와 지내는 순희는 재혼을 여럿 제안받는데, 후보자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의사 성규로부터 열렬한 구애를 받는다. 어느 날 그간 결혼을 마다한 성규가 돌봐온 어린 동생 정규를 보게 된 순희는 그가 자신이 “그림 붓을 든 후 오늘까지 머릿속에 그리”던 이상적 얼굴임을 한눈에 알아본다. 남몰래 정규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순희는,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성규를 매개한다. 성규는 그녀의 이러한 의도를 구애에 대한 승낙으로 오해하는 데 더해, 순희는 정규에게 가지는 감정이 이상적 외모에 대한 동경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규 또한 그녀와 같은 마음임을 숨기지 않는 이 상황에서 성규와 재혼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성규에 대한 가족적 애틋함으로 치환하려고 결심하지만 둘은 끝내 서로에 대한 정념을 확인하고야 만다. 순희는 정규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피해 산골에 와 있다가 ‘나’를 만나 이 모든 걸 고백한다.

아름다운 소년의 외모를 보며 자신의 작가적 탐미주의를 강렬하게 직시하는 작가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일면 오스카 와일드의 잘 알려진 탐미주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과는 달리 이 탐미주의에 대한 고백이 여성 작가를 매개해 전달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적절히 뒤섞음으로써 시점(point of view)의 다양성을 실험하는 듯한 이 소설은 ▲가부장제의 기율의 승인과 위반을 가르는 경계선에 위태롭게 서 있는 여성의 이야기가 ▲여성 작가 인물에 의해 전개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순희의 이야기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규약하는 가부장제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읽힌다. 자녀에 헌신하기 위해 가부장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어머니/아내 여성인 순희는 그가 가진 예술가적인 이상성을 구혼자의 어린 동생을 통해 확인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과 맞닥뜨린다. 이는 작가 여성의 탐미성 및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자율성을 승인하지 않는 시대에 대한 도전으로, 자녀와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소년을 연모한다는 설정 또한 이러한 가부장적 기율을 배반하는 탐미주의적 구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야기의 전달자 ‘나’는 실제 백신애 자신이 아닐지라도 여성 작가 백신애를 떠오르게 만든다. 순희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던 ‘나’는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한 줄기 눈물”을 흘린다. “소설을 쓰시는 이니까 그때의 내 가슴 속을 얼마만치라도 이해하실 수 있”겠냐는 순희의 호소를 동질자 여성에 대한 반응 너머에 대한 이해를 갈구하는 것으로 볼 때, 여성 작가가 남성 중심적 문학 담론장 안에서 끊임없이 ‘여류’로 불림으로써 끊임없이 그 작가로서의 (남성중심적) 여성 젠더 앞에서 탈각당해야 했던 1930년대 ‘여류 작가’의 지위를 상기시켜 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가부장적 규율을 탐미주의라는 장치를 거침으로써 위반하려고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 작가가 전달한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여성이자 작가인 존재를 매개함으로써 이 위반의 이야기가 비로소 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작가에 의해 집필되되 작가의 자기 정체화의 과정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반영되는 이상, 1920~30년대를 선도했던 탐미주의의 정치성의 기조는 일면 여성의 그것으로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백신애에 의해 제출된 선구적 탐미주의 작품을 통해 이것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