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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할 수 없는 것 욕망하기: 오늘날 문학이 재현하는 계급적 욕망에 부치는 두 번째 이야기 본문

5면/문학의 향기

할 수 없는 것 욕망하기: 오늘날 문학이 재현하는 계급적 욕망에 부치는 두 번째 이야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6. 27. 22:10

할 수 없는 것 욕망하기: 오늘날 문학이 재현하는 계급적 욕망에 부치는 두 번째 이야기

 

선우은실 평론가

 

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소설 보다 봄>>, 문학과지성사, 2023

 

 

자신을 둘러싼 조건은 그 자신이 가장 넘어서고 싶은 무엇이며, 동시에 자신이 가진 것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능가하기 위한 가장 큰 동력이 되는 동시에 근본적인 제약으로 작동한다. 오늘날 계급이 주지되는 방식이자 그것이 욕망을 추동하는 방식이다.

과거, 이 ‘조건’의 많은 것을 결정짓는 것은 자본이라고 여겨져왔다. 내가 가지지 못한 자본이 나의 계급을 조건지우며,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투한다. 이런 속에서 인물은 자신의 계급 탈출에 대한 선망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세속적 성취가 근본적인 계급 탈출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괴 혹은 세속적 욕망으로 그것을 정당화함으로써 자조하는 것. 본질적 극복을 고려하는 전자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구조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전망을 기대하지만 그것을 개인의 몫으로 넘어설 수 없다는 점에서 좌절을 마주한다. 전자의 선택에 ‘대의’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후자의 경우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정당화하거나 그것을 소시민성으로 치부하게 되므로 자기 비판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 부정’에 당착한다.

이처럼 계급의 결정적 조건이 ‘자본’에 있다고 믿었던 시절, 세계-자아 간 대립은 거대할지언정 뚜렷했다. 최근에는 사정이 다른 듯하다. 작품에서 발견되는 계급성의 문제는 이제 ‘금융 자본’에만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학벌, 인맥, 부모의 출신, 취향 등 부르디외 식으로 말해 ‘상징자본’이라는 복잡한 맥락에서 발생한다. 그런 면에서, 앞서 제시한 인물의 군상에서 다시 톺아보아야 할 것은 이들이 어떤 것에 문제제기를 하느냐가 아니라 계급적 욕망 앞에 선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답보적 상태를 보이고 있는가다. ‘자본’에 의해 촉발된 욕망은 이후 ‘자본’에 의해서만 재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의 그것마저 훔쳐 자기 것으로 하고 싶은 것이 오늘날의 계급성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피어나는 욕망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며,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이 그것에 도달하게끔 만들거나 그렇지 못하기에 ‘계급적’이다. 강보라의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이를 논의하기에 적절하다. 이 소설은 상징자본을 갖춘 ‘나’(김재아)가 우붓 여행지에서 자신의 계급성과 계급적 욕망을 확인하는 이야기다. 예술가 종사자인 ‘나’는 같은 계열에서 일하는 애인 현오의 욕망을 답습함으로 하여 자기의 계급을 구축한다. 이를테면 ‘나’는 현오의 미적 감각에 기대어 책을 쓰고 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에 대한 불안이 있지만 그 명성을 원한다. 현오를 통해서라도 획득한 ‘그것’은 바로 ‘나’가 ‘되고 싶은 것/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예시하듯 그들은 “사회적 명성을 얻은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흠집을 내는” “은밀한 놀이”(54)를 해왔다. 자신들의 계급적 욕망을 서로를 통해 확인하는 이 놀이는 두 사람을 오래 결속시켜왔지만, 여행 이후 ‘나’는 그것이 전만큼 큰 위안이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한가.

‘나’는 우붓에 요가 여행을 간다. 여행지 숙박소에서 만난 이들을 겪으면서 그녀는 자신이 가진 지위를 실감하고 우월의식을 느낀다. 송기호에 대해서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라 판단하고, 오 반장에 대해서는 사회에서 낙오된 자의 삶을 본다. 그녀는 자신이 쥐고 있는 어떤 것의 누락과 결핍을 그들의 모습을 통해 보고, 달리 말해 그들을 통해 자신이 지닌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그런데 숙소에서 만난 사람 중 호경은 그녀에게 어떤 불안을 일으킨다. 호경은 남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고 ‘나’가 가진 것을 깔보고, ‘나’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한다. 우연히 같이 참석하게 된 요가 클래스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준다. 갑자기 정전이 된 클래스에서 호경은 늑대 울음 소리를 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내면의 동물성을 꺼내놓도록 만든다. 호경은 여기저기 짓밟고 다니고 울부짖다가 ‘나’의 위로 쓰러지고, ‘나’는 그 밑에 깔려 “가슴을 들썩이며 온 힘을 다해 웃”는다. 

귀국하고 난 어느 날 ‘나’는 호경에게 받은 상투적인 그림을 보고서야 그 그림을 받았을 때 “아연함보다 불쾌감이 앞섰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생각한다. 소설이 직접적으로 서술해주지 않는 그 ‘이유’는 이런 것일 테다. ‘나’의 계급 의식은 그녀가 그어놓은 저들과는 ‘다른 나’라는 선에서 비롯된다. 선 바깥쪽 사람의 진위를 ‘알아보는’ 것은 자신의 일이며 이것은 저들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얼마간 저들을 달리보며 저들과는 ‘다른’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해왔던 ‘나’는 호경의 ‘선 넘기’를 통해서, 자신이 호경처럼 하지 ‘않음’이라 여겨왔던 것이 실은 자신이 이 선을 유지하는 한 ‘할 수 없음’의 영역에 있음을 확인한다. 그녀에게는 도달  불가능한 욕망이다. 그녀는 원치 않기 때문에.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하게 만든다.

호경 밑에 깔려 웃었던 나는 이제 알게 된다. 호경과의 접점에서 늘 자신의 영역으로 ‘넘어오고자’ 했던 이들의 그것으로 타인의 욕망을 재단했던 ‘나’는, 호경과의 접점을 통해 저 밖으로 넘어가고 싶었던 것이 실은 자신이었으며, 호경에 의해 그것을 경험했다는 것을. 그녀가 소설의 말미에서 이 여행을 “작은 모험”이라고 부르는 까닭일 터다. ‘할 수 있음’과 ‘없음’만으로도 추동되는 욕망의 모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