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그냥 지나가는 작은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며 본문

5면/문학의 향기

그냥 지나가는 작은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며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0. 5. 00:17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그냥 지나가는 작은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며

문진영 <지나가는 바람>(현대문학, 2023 6월호)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때가 되면 온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다루는 대범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그렇기를 바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때를 기다리는방식의 사유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든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의 표어가 베이비붐 세대에서부터 진작 삶의 지침이 되어왔음을 고려하면, 뭐든 되게끔 만드는만능의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이상적 인간상으로 설정해오는 일은 진작 시작된 듯하다. 이렇듯 새 시대에 맞은 옳은 인간상에 대한 이데올로기화는 급변하는 매체에 맞물려 자기 표현이 극도로 자유로워진 시대를 표방하며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노력하면문자 그대로 무엇이든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의 경계조차도 쉽게 넘나들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뭐든 되는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 가운데 성공 신화가 자리하고 있음은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뭐든 되는것은 정말로 용인되는가? 세상이 추동하는 욕망으로서 뭐든 되는의 범주는 얼마만큼 생산적인(productive, creative)’가로 설정된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거나 경제적 생산성에 기여하거나, 뭐든 수요가 있는(salable)’ 콘텐츠로서의 인간상을 발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새롭고’ ‘신선한콘텐츠로서의 한 사람의 삶은 그 굴절의 각이 극적이면 극적일수록, 그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더더욱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한다. 문진영의 <지나가는 바람> 민지처럼 말이다.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인물은 민지지만, 정작 이 소설의 주인공은 도은이다. 도은의 직장 동료였던 민지는 퇴사 이후 프랑스 등 해외에서 찍은 영상으로 인플루언서로 급물살을 탄다. 이윽고 살을 빼겠다며 각종 운동을 섭렵해 빠른 속도로 체지방 감량을 sns에 증명한다. 도은은 그런 민지를 선망하고 미워한다. 그녀가 보여주는 이상적인 갭이어의 생산성을 도은도 바라지만 정작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이 도은이 원하는 삶을 실천할 수 없게 만드는가에 있다. 퇴사 이후 민지와 같은 방식으로 갭이어를 살아가려던 도은은 자신이 잠깐이 아니고 계속쉬고 싶은 상태임을 깨닫는다. 하나 공교롭게도 도은의 주변에는 민지뿐만 아니라 성공한 커리어우먼인 도은의 엄마를 비롯한 갓생러”(혹은 그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 산재한다. 이들 사이에서 도은은 자기의 상태를 쉬이 수용하지 못한다. 세간의 욕망이 보편적인 그것으로 영향을 끼치는 틈바구니에서 도은이 어떤 을 필요로 하든,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온전히 그 자신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갓생을 지향하는 이들의 삶에는 물론 나름의 정당성과 방향성이 있다. 다만 어떤 삶의 모양은 오롯이 자기가 만들었다고 생각할지라도 실은 이상적 타인의 삶에 비춰 만들어지기도 함에 보편 욕망의 자장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곰곰 떠올릴 때 자신의 속도, 시간, 때와 역량을 가늠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이는 도은의 모습은, 현실을 살고 있는 누구나가 지닌 자기 모습의 한 조각처럼 읽힌다.

뭐든 잘하고 잘 버티는 사람이라고 삶의 부침(浮沈)이 없을까. ‘갓생러가운데 한 명인 우림과의 대화는, 지금 삶의 속도와 이상성에 대한 영향과 그에 따른 에너지의 소진이 생산성의 기준에서 판별되거나 정당성을 얻는 것은 아님을 성찰하게 만든다. 전 직장 후배인 우림은 이번에 대리가 되었다며 도은에게 만남을 청한다. 그는 도은에게 몇 없는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 중 하나로, 회사 생활을 곧잘 할 뿐만 아니라 상사로부터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민지만큼 프로 갓생러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자기의 속도와 역량에 맞게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에게 도은이 선뜻 마음을 열수 있었던 것은, 자기와는 다른 삶의 모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림은 잘하고 있는듯 보이는 자기 삶 한가운데 끊임없이 뭔가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초조함이 있음을 고백한다. 도은이 퇴사 후에도 여전히 겪고 있는 불안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런 이들에게 시간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이상적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소진되는 것으로 느껴질 뿐이기에, 정작 현재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도은이 시간의 개념을 잊고 싶어하고, 우림이 시간을 아예 없는 셈치려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무기력에 잠식되지 않는다.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함께 대교를 건너며 둘은 곧 후회할지도 모를 일을 하나씩 저지른다. 우림은 도은의 sns를 대신 삭제해주고는 곧장 퇴사할 사람처럼 오늘 받은 새 명함을 강을 향해 흩뿌려버린다.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음에 대한 자기 감각을 일시적으로나마 되찾으려는 이런 시도는, 인물들도 알고 있듯, 곧장 후회되거나 번복될 일일 수도 있다. 다만 이는 잠깐이나마 적극적인 휘청거림일진대, “그냥 지나가는 바람에도 어떤 것은 그저 흔들거림으로써 존재함을 떠올려보아야겠다. “같이 엎어져있는 갈대가 되면 좀 어떤가 하는 마음을 먹어보는 도은의 마음에 나의 그것을 얹어놓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