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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틈 채우기의 서사 본문

5면/문학의 향기

틈 채우기의 서사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5. 23. 01:47

-정선임, 「무슨 말인지 알죠」, 『고양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산책방, 2022.

 

“무슨 말인지 알죠?”

정선임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소설 내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문장이다. 이 말은 확인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했을 때에도 사용된다. 이런저런 말의 자리를 많이 비워두었지만 당신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라는 의미로.

소설은 무엇에 대해 “무슨 말인지 알죠”라고 묻는가. 이를 따라가기 위해 소설의 구조를 먼저 짚는다. 이 소설은 크게 두 개의 시점(point of view)을 교차시킨다. 소설은 우선 안나의 1인칭으로 현재의 서사를 진행한다. 안나는 현재 병상에 누워 있는 노인 여성으로, 손녀 율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현재를 떠올리고 과거를 회고한다. 한편 다른 글씨체로 교차 서술되는 서사가 있다. 이 서사는 3인칭으로 전개되며 1984년의 안나 그리고 안나의 사돈인 미영이 만났던 어느 날을 비춘다. 이렇듯 ‘안나의 진술’과 ‘안나/미영에 대한 서술’의 두 서사 라인을 교차시키며 진행되는 서사는, 어떤 사실을 ‘보여줄’ 뿐 충분히 해설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각 인물과 독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를 유념하면서 ‘무슨 말인지 알죠’라는 말을 헤아려보기로 하자. 이야기는 병상에 있는 안나에서부터 시작한다. 안나는 자신을 찾아와 두서없이 이야기하고 가는 손녀 율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미영과 안나 그리고 율리아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서울에 갔던 1984년의 어느 날을 떠올린다. 율리아를 안나의 딸 내외의 집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 ‘서울대공원 개장’이라는 기사를 보고 미영은 충동적으로 안나에게 서울대공원행을 제안한다. 그곳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많네.”(60)라며 무심코 읊조리던 안나를 보던 미영은, 개장 기념으로 서울대공원을 방문한 대통령을 보고는 “저쪽에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와 있다”(68)며 손에 돌을 쥐여준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이거라도 던져보라면서. 안나는 그 제안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돌을 두 손에 쥐고 조준해본다.

여기에서 몇 가지 사실을 되짚어보자. 1984년 서울대공원 개장, 안나가 대통령을 향해 돌을 조준했다는 사실, 그리고 미영이에게 돌을 쥐여주었다는 사실은 단편적으로만 제시되고 있기에 각 ‘사실’ 사이의 틈이 넓게 벌어져있다. 이 틈을 어떻게 메워볼 수 있을까? 먼저 1984년과 안나의 돌을 연결지어보자. 안나는 이날을 회고하며 ‘불온서적’을 단속하던 시기에 입대했던 아들이 끝내 사망했음을 암시적으로 부연한다. 즉 안나의 대학생 아들은 전두환 정권 때 사망했다. 군사 정권 시기 이데올로기 억압의 피해자로서 안나의 아들과 안나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사가 직접 말해주지는 않지만 ‘무슨 말인지 알죠’ 하는 표징으로서 제시되는 사건 중 하나다.

또 다른 하나는 어째서 미영이 안나에게 돌을 쥐여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안나에 따르면, 미영은 일찍이 남편을 여읜 이후 ‘양키시장’에서 떼온 미군 물품을 판매하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즉 미영은 6.25의 직접적 체험을 경유한 인물로서, 이데올로기 전쟁의 생존자임을 알 수 있다. 미영이 안나의 손에 돌을 쥐여주고, 안나 대신 울었던 것은 두 사람이 ‘꼭 같은 것’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도,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서사의 틈 사이에 기입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다. 이렇듯 서사는 이렇듯 적극적으로 틈을 마련함으로써 인물과 독자 모두에게 ‘말하지 않았지만(혹은 못했지만)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한 헤아림을 요청한다.

그런데 이 ‘틈 메우기’는 오로지 안나의 삶에만 집중되어 있지는 않다. 즉 안나를 중심으로 미영과 율리아가 말하지 않는 틈을 메우게끔 만드는 서사적 장치이기도 하다. 안나는 1984년 이후의 미영의 삶에 대해서도 회고한다. 미영은 아들의 강권으로 가게를 정리하고 아들 내외의 집으로 들어가고, 이후 미영의 치매가 가속화된다. 안나는 “집에 가고 싶”다며 “만 원만” 달라는 미영을 보며 그녀 손에 지폐 몇 장을 쥐여주며 속삭인다. “자유롭게 살”(72)라며. 이것이 안나에 의해 채워지는 미영의 삶의 ‘말하지 않은 부분’이다.

안나는 훗날 “당신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을 더 많이 알았다면 무슨 말인지 알죠? 라고 말을 마치지 않아도 됐을”(77)지 질문해본다. 그러나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은 독자는 안다. 그 ‘말하지 않음/못함’으로 남아 있는 공백은 그곳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는 타인에 의해 메워진다는 것을. 관련해 율리아의 층위를 언급해둔다. 정치, 이데올로기, 여성 인권에 대해 관심이 많은 율리아는, 병상 맡에서 할머니를 “계속 사랑하고 싶었”다고 말하지만, “둘 다 닮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할머니’가 안나인지 미영인지 불분명한데다, 안나는 율리아의 이 말을 자신이 다 헤아리지 못함을 안다. 그러나 이 빈틈을 독자는 헤아릴 수 있다. 선대 여성의 삶의 애환을 이해하는 동시에 ‘여성’으로서 시대의 규율에 복부하는 삶 너머를 상상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만들고자 하는 자기 시대의 몫이 있음을, 율리아는 말했고 또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렇게 우리는 서사의 틈을 우리의 삶으로서 메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