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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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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문학의 향기

할머니와 손녀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1. 7. 21:05

할머니와 손녀

 

토베 얀손, 안미란 옮김, 『여름의 책』, 민음사, 2019.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최근 ‘여성모계서사’가 역사성을 확보하는 방식에 대해 흥미로운 평론 한 편을 읽었다.

 

여성들이 만들어낸 할머니의 문학적, 회화적 이미지는, 많은 경우 그들이 목격한 할머니의 모방이기보다 억압 없는 모성 또는 사심 없는 자애의 환상이지 않을까.  ( 황종연, <모계 여성 서사와 그 불만>, 문학동네, 2023년 여름호, 433~444면 )

 

요약건대 한국 문학에서 모녀는 혐오적 관계 혹은 어머니적인 것의 계승과 부정을 동시적으로 보이는 양상을 보이는 데 반해, 조모손녀는 그것이 해소된, 이상화된 관계처럼 보인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이러한 재현의 관건은 모녀와 조모손녀 자체라기 보다는 그렇게 재현된 ‘까닭’을 헤아리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너그러운 ‘할머니’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시선은 유효하나, 적어도 각 인물의 사연을 고려하면 건넌 세대의 인물에게 이상성을 투영하는 것의 ‘필요성’ 또한 납득되지 않는 것은 아닐 테다.

탈 이상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조금 더 현실적 캐릭터인 할머니와 손녀의 서사가 있다면 어떨까? 이는 위와 같은 ‘불만’에 좋은 참조점이 될 수도 있을까? 아마 같은 주제를 의도하는 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현실적 캐릭터’ 혹은 그 관계 맺음의 형태와 관련해서 토베 얀손의 『여름의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이 소설은 인물이 꽤 ‘실감 나는’ 현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자상하고 인자한 할머니와, 의젓한 아이의 모습이 그려지는 대신 다면적이고 천방지축인 인물들이 서로 자주 입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쯤되면 우리가 조모손녀 서사에 투영하는 ‘이상성’이라는 것에 대한 비판을 충분히 납득하면서도, 그러나 이상화되지 않은 그들‘다운’ 모습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런 모습이 따로 있으리란 전제 역시 다른 이상화된 모습에 불과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손녀인 소피아와 할머니는 자주 다투며 딱히 화해하지 않고 함께 지낸다. 이들은 사사로운 일상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결코 일원화되지 않는 자신의 뒤죽박죽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데, 이런 모습이 탈 이상화된 조모손녀 캐릭터의 힌트로 여겨질 법하다. 한 예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한 「풀밭」의 다음 장면을 보자.

 

“소피아. 이건 정말 싸울 문제가 아니야. 다 끝난 다음에 벌까지 받지 않아도 인생이 그 자체로도 충분히 힘들다는 건 너도 알겠지. 죽으면 위로를 받는 거야. 그런 거지.” “하나도 안 힘든데.” 소피아가 외쳤다. “그리고 악마는 어쩔 거야? 악마는 지옥이 집인데!” (...) “얘야, 나는 아무리 해도 이 나이에 악마를 믿지는 못하겠구나. 너는 네가 믿고 싶은 걸 믿어. 하지만 관용을 배우렴.” “그게 뭔데.” 아이가 삐져서 물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거지.” “존중하는 건 또 뭐고!” 소피아가 외치며 발을 굴렀다. “다른 사람이 믿고 싶은 걸 믿게 두는 거지!” 할머니가 외쳤다. “나는 네가 사탄을 믿게 두고 너는 나를 내버려 두는 거야.” “욕하네.” 소피아가 속삭였다. “안 했어.” “했어. 사탄이라고 했잖아.” (41~42면)

 

풀밭 근처를 거닐면서 소피아와 할머니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둘은 지옥이나 사탄이 있네 없네로 다툰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를 이 이야기는 세대와 경험차가 있는 두 인물의 인생관을 투영하는 주제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어 본 할머니는 소피아의 질문이 얼토당토않다고 여긴다. 가뜩이나 살아있느라 힘들었는데, 지옥이 있느냔 상상을 함으로써 죽어서도 벌 받는 곳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편 소피아는 지옥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없으면 악마는 어떻게 되는지, 인생은 별로 힘들지도 않은데 지옥이 왜 없다는 건지 성에 차지 않는 대답을 들어 심술이 난다.

이들의 투덜거림의 종착지가 관용과 존중이라는 점은 놀랍다. 할머니가 딱히 손녀를 어르지도 손녀가 그러한 말들에 순응하지도 않은 채 티격태격하면서 말을 겨루는 두 사람은 관용과 존중을 ‘사탄을 믿는 것’과 ‘사탄이 없다는 나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으로 결착짓고, 느닷없는 소피아의 “욕하네”라는 말로 소강된다.

이 서사를 조모손녀의 것으로 읽지 않아도 충분히 흥미롭다. 이들의 대화가 일상적이며 딱히 교훈을 주려 하지 않고 캐릭터를 전형화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동시에 일상적이지 않고 얼마간의 교훈을 담고 있고 캐릭터를 전형화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형성’의 문제에 있어, 이들은 상호배반되는 가치를 내재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비전형적이고, 그러나 이 비전형성이야말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춘 특성이란 점에서 전형적이다. 즉 이 서사에서 할머니와 손녀는 조모손녀이자 그녀 자신으로 이미 재현된다. 그러니 서사에서 인물의 관계 형식을 포함하여 이미 그들 자신의 모습으로 상상되어 재현되고 있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로부터 ‘무엇을 읽어내고자 하며 왜 그러한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