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신화가 되어버린 아버지와 길을 개척하는 딸 본문

5면/문학의 향기

신화가 되어버린 아버지와 길을 개척하는 딸

Jen25 2024. 3. 9. 15:42

신화가 되어버린 아버지와 길을 개척하는 딸

 

정용준 <은유의 천재>(릿터2023. 12~2024. 1)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남성 영웅이 길을 떠나 모험을 하고 자신의 신()적 기원 혹은 왕의 후계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아 회귀하는(그 행보가 꼭 해피앤딩은 아닐지라도) 근대 이전의 원형적 신화 플롯에서, 평범한 출생의 문제아적 주인공이 자신을 제약하는 사회 구조와 대결하여 마침내 패배하는(루카치의 잘 알려진 문장 길은 시작되었으나 여행은 끝났다를 떠올려보라.) 근대 소설의 플롯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면 그 수행자가 대부분 남성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할까? 최근 한국 서사 가운데 모계 인물을 중심으로 오랜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사를 다시 쓰기 하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주로 모녀 혹은 조모손녀 인물에 의해 제시되곤 하는 모계 중심 여성 서사는 단순히 그 탐구의 대상이 여성이라는 점에서만 특이점을 지니지 않는다. 남성 인물이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적자(嫡子) 남성이자 아버지의 혈연 후계자라는 기준에 부합하려는 시도와 좌절을 통해 방황하는 자기 정체화를 경험해나간다면, 여성 젠더의 경우 이미 거세된’(탈락된) 정체성을 지닌 자가 그 안에서 어떠한 부조리한 요구를 부여받고 있으며 분열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자아주체로서의 자기 인식 및 그에 대한 세상의 승인 여부 및 그에 따른 차이 나는 경험은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를 이끌어낸다.

하나 이러한 부계적 시선의 남성 인물 중심의 서사와 모계적 접근 방식을 취하는 여성 인물 중심의 서사가 각각 그 자신을 대변하는 시선에서 쓰이고 있는 한, 부계 중심의 근대 서사가 서서히 저물고 새로운 젠더적 시선에서 서사가 재구조화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정용준의 <은유의 천재>는 눈여겨볼 만하다. 제목의 은유의 천재가 서장 고전학자이자 한 청년 여성의 아버지인 이진기를 지칭하는 만큼 이 소설은 남성 가부장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신화적이기도 근대성을 표방한다고도 믿어왔던 그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인물의 시선을 교차시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오한이 사서로 근무하고 있는 한 도서관에 신화학자 이진기가 강연을 하러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둘은 부녀 관계로, 오한은 부계 성을 이어받고 싶지 않아 어머니의 성으로 갈음하기 위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들 사이의 주요 사건은 어머니/아내의 죽음이다. 여전히 여성에게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은 채 그 죽음을 인물 각성의 계기로 삼고 있다고 본다면 이는 부계 서사의 클리셰적 흔적으로 언급될 법하다. 한편 이는 아버지 남성이 등장하는 서사에서 그 자신의 신화적 몰락을 자기의 입으로 선고하게끔 하는 장치로 볼 수도 있다. 근대 이후의 서사를 모계를 돌리는 방식에 어머니/아내의 죽음과 그에 대한 이해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해의 차이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어머니/아내 여성을 이해하는 적격자가 새롭게 판명되며 새로운 진실이 드러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녀의 자살에 대해 오한은 아버지와의 연을 끊는 것으로 그 애도를 다하고자 한다. 한편 이진기는 자신을 끊임없이 신화적 인물에 빗대며(아내 사후 그는 자신을 오르페우스에 빗대 “2rpheus”라는 SNS 아이디를 사용한 바 있다) 아내를 기리고자 한다. 이들이 각각 그녀의 죽음을 헤아리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오한이 어머니의 적격자로서 그녀의 죽음을 자기의 방식대로 전유하려 한다면, 이진기는 자신의 신화적 정체성을 위해 그녀의 죽음을 배치한다.

 

 

죽은 자는 누가 가져야 하는가. 남편일까. 딸일까. 딸이어야 한다. 나는 엄마에게서 났고 내 유전자의 절반은 엄마의 것이니까. 아빠는 아니다. 남편? 그는 처음부터 남이었다. (140)

 

그런데 한이야. 사느라 바빴다. 정말 매 순간이 전쟁이었어. 난 내가 먼저 생각하는 프로메테우스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 보니 나는 나중에 알게 되는 어리석은 에피메테우스였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여기에서 나온 말인지 알고 있니? (143)

 

 

그녀를 중심으로 두었을 때, 즉 모계를 중심으로 할 때 그녀의 뜻을 이을 수 있는 적격자는 직접적인 혈연 관계에 놓인 자녀인 오한이다. 자녀 여성은 처음부터 남이었던 남편, 오한기와는 다른 태생적 적격자다. 한편 이한기는 자신이 전쟁을 치른 신화적 영웅이라 믿고 있다는 점에서 분열적이고 비극적 근대 표상을 우스꽝스럽게 재연하는 자이며, 더는 유효하지 않은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현대 버전 돈키호테다. 그가 아내를 사유하는 방식에서 강조되는 것은 영웅과 동일시되는 그 자신이다. 이진기는 자기의 이야기로 그녀를 포섭하지 않는 한 그녀를 애도할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한 자임을 발설하는 중이다.

벤야민이 말했듯, 우리가 소설 속 허구적 죽음으로부터 살아 있는 현실의 의미를 헤아린다는 근대 문학(소설)의 역설을 이해한다면, 서사 속에서 신화적 죽음을 통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현실(세계)과 합일되지 않는 존재로서 자신에 대한 분열적 성찰일 것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어머니의 혈연임에도 불구하고 부계 성을 따르고 그것을 버리기 위해 제도와 대결해 길을 개척해야 하는 오한이지, 신화(이야기)와의 동일시를 무리 없이 이뤄내는 이진기가 아니다. 보다 객관적 3인칭 서술에 의해 이진기가 전개되고 있음에도, 주관적 1인칭 서술자 오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더욱 설득력을 주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포스트 근대 서사의 새 주인공은 어머니를 따르는 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