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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도롱이’는 무엇을 보은하는가 본문
‘도롱이’는 무엇을 보은하는가
범유진 「우산이 나타났다>(『여름 기담: 순한맛』, 읻다, 2023)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최근 영화 <파묘>가 큰 인기를 얻었다. 한국적 오컬트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의 핵심은 눈에 보이지 않은 채 존속되는 원한과 그에 대한 초자연적 해결에 있다. 이는 빙의가 된다든가, 귀신/요괴/정령 따위에 의해 물리적 법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의식적/육체적 해를 입는다든가 하는 구체적 장면으로 드러난다. 요컨대 그 형태가 얼마나 다르든 비육화적이고 추상적인 개념, 이를테면 민족의식이나, 도덕, 원한, 증오, 욕망 등과 같은 것이 초자연적인 힘에 깃들어 초자연적 존재의 형상을 한 채로 발현된다. 그런데 이 기이한 체험, 즉 가시화되지 않은 채 지속되어온 업보에 대한 초자연적 해결과 청산의 서사가 오늘날 유효한 정동을 이끌어내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범유진의 기묘한 소설, <우산이 나타났다>를 통해 헤아려보고자 한다.
이 소설에는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자녀 콩을 키우는 유빈이 등장한다. 유빈은 콩을 낳은 뒤 육아 휴직을 했고 복직하지 못한다. 술에 취하면 어디선가 고물을 주워 와 정성스레 고치는 습관이 있는 유빈은 경력 단절에 힘겨워하며 육아 후 모처럼 맥주를 마신다. 바로 그날, 취기에 쭈그리고 녹슨 거울을 열심히 닦던 유빈은 지아를 만난다. 지아는 유빈이 쭈그리고 앉아 있던 곳 근처에 위치한 공방 ‘추억 수리점’의 주인이다. 연배를 가늠할 수 없는 노인의 얼굴을 한 지아는 유빈에게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 않느냐며, “영원히 살 수 없는 인간에게, 영원을 선물하는 가게” 즉 자신의 공방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권한다.
유빈은 이날 이후 지아의 공방에서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물건을 수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열병으로 콩이 앓기 시작하면서부터 유빈은 그 무엇도 고칠 수 없게 된다. 콩이 아프기 얼마 전, 유빈은 비오는 날 콩을 마중하러 가던 길에 짚으로 엮인 우산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본다. 유빈은 홀린 듯 그 우산의 구멍 난 곳을 기우기 시작했고 그 시간 동안 아이는 잠시 방치됐다. 그날 이후 이유를 알 수 없이 콩이 오래 앓기 시작한다. 유빈은 이유를 모른 채 죽어가는 콩을 보살피는 시간을 하염없이 흘려 보내면서, 콩을 데리러 갔던 그 비오는 날 길에서 보았던 나팔꽃을 떠올린다. “콩이 없으면 좀 더 느긋하게 볼 수 있을 텐데. 이 예쁜 꽃을.”하고 읊조렸던 과거의 자신을, 길거리에 떨어져 있던 우산을 깁는다며 콩을 빗속에 기다리게 했던 자신을, 유빈은 후회하고 저주한다.
이후 지아로부터 들은 ‘도롱이’ 이야기는 콩을 죽을 위험에 빠뜨리게 한 것이 그 초현실적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게 만든다. 지아의 어머니는 오래 전 열병에 앓아 죽었던 아이의 시신에 볏짚으로 만든 망토인 도롱이를 만들어 둘러준 적이 있다. 이후 영문 모를 열병을 앓았던 지아 어머니는 깨끗이 병을 털고 일어나는데,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도롱이’가 된 그 아이가 보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유빈의 이야기를 겹쳐 사건의 전말을 헤아리자면 이렇다. 볏짚에 구멍이 나 곤란에 처했던 도롱이를 유빈이 발견했고, 유빈은 볏짚을 기워 도롱이를 구해주었다. 그때 흐드러진 나팔꽃을 감상하던 유빈이 문득 육아에 대한 피로감과 자신이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랐고, 도롱이가 그 소원을 들어주어 그 이후부터 콩이 아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콩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가던 유빈은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몽롱한 상황에서 도롱이를 마주치고 도롱이에게 콩을 살려내라며 화를 낸다. 도롱이는 비를 맞고 있는 그녀에게 우산을 건네고, 머잖아 유빈이 아이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으며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에서 유빈의 소원을 들어주는 도롱이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신묘한 존재다. 도롱이는 그가 가진 초인간적이고 초월적인 지위로 하여 유빈이 처해있는 역설적 상황과 배반되는 욕망을 보여준다.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은 동시에 ‘어머니’란 수식어 없는 유빈의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욕망은 유빈이 어머니로 살아가게 된 이상 양립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대립되는 형태의 욕망으로 이해된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유빈은 육아로 인해 일상을 전쟁처럼 살아가지 않고 때맞춰 피는 꽃을 즐길 여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아이가 있었기에 유빈은 사랑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결국 도롱이에게 상반되는 두 번의 소원을 빌게 되는 서사의 흐름은, 어머니-여성이 처한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이 도롱이처럼 초월적 존재의 힘으로도 극복될 수 없는 딜레마임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한편 역설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어머니-여성의 삶이라 할진대, 초월적인 힘에 기대어서라도 지금 이 삶의 딜레마를 이겨내고 싶은 것이 보은하는 도롱이로 발현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좀처럼 이겨낼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상상력이란, 대가 없이 초월적 존재로부터 행운과 영광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비가시적인 욕망을 초월적 존재로 가시화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는 것, 그 직면의 고통과 괴로움의 대가로 끝끝내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하는지 스스로 알아나가는 것. 우리가 ‘도롱이’적 존재를 통해 갈구하고자 하는 삶의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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