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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영원히 감상될 거장의 그림, 『백치』의 이미지를 해설하다 본문

5면/저자와의 대화

영원히 감상될 거장의 그림, 『백치』의 이미지를 해설하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6. 27. 22:09

석영중 교수

Q: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중 하나인 『백치』(Idiot)는,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힘겹게 쓴 소설이기도 합니다. 또한 도스토옙스키 전문가로 알려진 선생님께서는 이 『백치』 연구서를 집필하시기 위해 피렌체까지 다녀오기도 하셨는데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에서 『백치』는 어떤 위치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더불어 선생님께 『백치』는 어떤 의미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A: 『백치』는 도스토옙스키의 오랜 숙원인 그리스도를 닮은 인물의 형상화가 실현된 소설입니다. 신이자 인간인 존재를 주인공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작가로서, 특히 19세기 리얼리즘 소설가에게 거의 불가능한 과업이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감히 이것에 도전했습니다. 아마도 그의 창작 인생 전체를 통틀어 이보다 더 위험하고 무모한 기획은 없었을 거예요. 수시로 간질발작까지 앓아가며 소설을 쓰면서도, 성에 차지 않아 몇 번이고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파기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창작을 하던 중, 제네바에 머무는 동안 태어난 첫딸 소냐가 생후 3개월 만에 감기로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원래 도스토옙스키는 일생동안 오로지 글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글을 써냈던 작가였습니다. 그러나 소냐의 죽음은 너무나 거대한 슬픔이어서 그는 『백치』 집필을 결국 중단해야만 했죠. 

아이가 죽은 제네바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 브베(Vevey)로 이동하여 통곡 속에서 소설을 쓰기를 이어 갔고, 마침내 피렌체에서 완성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도스토옙스키는 늘 『백치』에 불만족을 표했고, 하고자 하는 말의 십분의 일도 못했다며 불평만 늘어놓았죠. 그럼에도 그는 훗날 “『백치』를 제 작품 중 가장 훌륭한 것이라 평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저를 언제나 감동케하고 기쁘게 한답니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치열하고 고민했고, 아파했으며,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그 소설을 사랑했다는 뜻이겠죠. 저 역시 그런 점에서 『백치』를 각별하게 사랑합니다. 분석하기 가장 어려운 만큼 더 애착이 가요. 백치에 비하면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훨씬 잘 읽히고, 해석하기도 용이합니다. 하지만 『백치』에는 이 소설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기이하고 매혹적인 다른 차원이 있어요.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고 알 것 같지만 언어로써는 표현할 길 없는 어떤 압도적인 아름다움, 슬픔의 정수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Q: “나는 이미지를 구축해야 합니다.” 책에서 소개된 도스토옙스키의 선언이자, 이 책의 주제를 관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이미지’(=오브라즈obraz)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과 그것이 전달하는 ‘주제’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접근이라고 지적하고 계신데요. 연구 대상으로서 이미지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이를 통해 『백치』를 볼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도스토옙스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나 플롯이나 주제가 아니라 이미지입니다.  이미지는 그를 다른 소설가와 구분짓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자, 동시에 외관상 치밀한 구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의 소설에서 최고의 형식미를 발견하도록 해주는 요인이기도 해요. 도스토옙스키는 철저하게 구체성을 추구한 작가예요. 그는 그 어떤 관념도 관념 자체만으로 천착한 적이 없었으며, 그에게 형태를 갖지 않는 것은 비존재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은 그의 소설 속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반드시 구체적인 이미지로 변형되어야 했죠. 예컨대 윤리의 주제를 소설 속에서 발전시키려면 윤리의 이미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윤리라는 주제를 인물의 말‧행동‧담론‧행위 등을 통해 관념적으로 묘사하면서 파헤치는 것과, 윤리라는 관념을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실은 완전히 다른 서사 방식입니다.

그리고 구체성과 구체적인 이미지의 추구는 그 어떤 소설에서보다도 󰡔백치󰡕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주인공을 그리스도와 닮은 사람으로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내밀한 사고를 이미지로 표현하려는 그의 시도와 직결되죠. 그러니까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부도덕한 당대 사회를 서술할 때, 그리스도를 닮은 주인공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여러 다양한 이미지들의 얽힘을 보여주는 것은 전통적인 서사의 방식보다 훨씬 입체적이면서도 독자에게 사유할 여지를 훨씬 깊게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동시성’이라는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서사 방식과 연관됩니다. 그의 소설을 끌어가는 것은 시간적인 흐름이 아닌 이미지의 동시적인 얽힘이에요. 동시에 서로 연관될 수 있는 것들만이 도스토옙스키의 세계 속으로 진입합니다. 이와 같은 성향은 그의 유명한 “다성악 소설(полифонический роман)”의 토대이자 이중적 발화의 원천이기도 해요. 그리고 그의 양가성 또한 이미지 위주의 서사 덕분에 가능합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인간과 사상에서부터 관념, 사물에 이르기까지—동시에 여러 시각에서 바라 볼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였어요. 이미지 위주의 서사는 그의 이러한 능력과 완벽하게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시인 폴 클로델이 이보다 “더 아름다운 구성은 없다”고 극찬했던 『백치』의 도입부에는 기차와 함께 ‘철도’가 등장합니다. 언뜻 보면 사실 관계에 대해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 도입부가 왜 그토록 아름다운지, 도스토옙스키는 이 도입부를 통해 『백치』의 전체 세계 혹은 전체 이미지를 어떻게 구축하고자 했는지 궁금합니다. 

A: 미시킨과 로고진, 두 주인공이 기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는 첫 장면의 의미는 어마어마합니다. 만일 도스토옙스키가 철도라고 하는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가려 했다면 소설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도는 당대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은 물론, 러시아의 상인계급과 물신 숭배 사상을 담아내는 ‘이미지’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이후 서사는 그 장면으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죠. 철도는 부(물질)의 주제를 표현하는 동시에 첨단 기술의 발전, 경제라고 하는 범주를 형성하고 인접한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하여 파생주제를 생성합니다. 파생 이미지들이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이미지망을 직조해나가는 과정은 거의 경이 그 자체라 할 수 있어요. 

철도라는 이미지에 속한 무수한 작은 이미지들, 이를테면 기계의 이미지, 철도 덕분에 부를 축적한 상인의 이미지, 상인이 사는 집의 이미지 등은, 탐욕과 살인과 죽음의 테마와 연결되면서 묵시록에 등장하는 창백한 말을 연상시키다가, 칼의 이미지와 합쳐지며 그 합쳐진 이미지 복합체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는 이미지들의 망은 동시성으로 규정되는 소설이 결여할 수밖에 없는 기원과 역사성을 내용면에서 충분히 보충해 줍니다. 견고한 이미지의 망은 또한 형식면에서 소설의 취약점이 될 수 있는 느슨한 인과관계를 상쇄시켜 줄 뿐만 아니라, 클로델이 말한 것과 같은 완벽한 형식미의 구현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석영중,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열린책들, 2023.

 

Q: 선생님께서는 『백치』에 등장하는 ‘칼’의 이미지가 영원성과 순간성, 무한성과 유한성 그리고 최종성과 확정성 등 시간과 시간성의 의미론을 가시화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도스토옙스키 본인도 “비존재에 대한 존재의 관계”라고 정의할 만큼 시간은 복잡하고도 추상적인 개념인데요. 시간이 어떻게 가시화되는지, 『백치』의 인상적인 예 하나를 통해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질문에서 잘 지적했듯, 도스토옙스키는 심지어 시간까지도 이미지로 표현하려 한 작가입니다. 칼은 시간을 형상화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죠. 칼은 개인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끝내는 살인의 도구이며, 기요틴의 칼날로 확장되면서 처형의 모티프를 활성화시킵니다. 그리고 칼의 이미지가 표상하는 시간성은 처형 직전의 사형수의 이미지에서 극대화되죠. 사형수에게 주어진 시간은 5분 정도밖에 없는데, 이 5분이 그에게 있어서는 무한대의 시간이고 엄청난 재산처럼 여겨졌다고 사형수는 술회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형수는 그 무한한 5분을 견딜 수가 없어 차라리 어서 처형당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저는 이 대목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의 시간론을 함축하는 대목, 소설 전체에서 가장 압도적인 대목중의 하나라 생각해요. 5분이 무한대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무한대는 또 견딜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시간의 심오한 관계를 요약해 줍니다. 

무한, 특히 수학적으로 가시화시킬 수 있고 철학적·경제학적으로 구체화 할 수 있는 무한은 결코 재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무한은 공포이며 사멸이며 자멸입니다. ‘무한경쟁’과 ‘무한리필’ 등에서부터 ‘무한공간’과 ‘무한반복’과 ‘무제한 000’에 이르기까지, 모든 무한들은 궁극적으로 천국이 아닌 지옥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무한이야말로 다른 모든 개념을 뒤틀고 타락시키는 개념이라 말한 바 있죠. 『백치』의 사형수는 직관적으로 무한 시간의 그 지옥을 알아차렸던 것이고, 도스토옙스키는 이를 칼날의 이미지와 연결지어 소설로 그려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도 언급되어 있듯, 『백치』라는 작품은 그 자체로 언제까지고 인류에 도래하여 강생한(voploshchennaia) 그리스도의 모습을 비춰줄 불멸의 ‘그림’이기도 합니다. 포스트휴머니즘-트랜스휴머니즘 등의 사조가 등장하고 탈(脫)인간의 담론이 논의되는 현대 사회에,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라는 그림이 어떤 비전이 되어줄 수 있을지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A: 제가 반드시 『백치』에 관해 뭔가 쓰고 싶었던 것도, 그리고 『백치』를 쓰면서 무의식중에 계속 생각했던 것도 바로 이 질문의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지(이콘)는 알 수 없고 이름 지을 수 없는 절대적인 본질의 반영이자 비가시적인 어떤 존재에 대한 가시적인 기호라 할 수 있어요. 이런 맥락에서 이미지는 궁극적으로 진리의 버팀목으로, 로고스 그 자체로 연결됩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미지에 집중하게 된 원인의 근원에는 인간이 “신의 모습과 닮음”으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가 놓여 있어요. 가장 아름다운 로고스로서의 ‘오브라즈’가 궁극의 윤리를 상징한다면 ‘베즈오브라지에’는 최악의 반윤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오브라즈’와 ‘베즈오브라지에’를 구별하고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미적 감각을 넘어 도덕성을 결정하는 척도가 됩니다. 질문의 말처럼 『백치』라는 소설 전체도 하나의 이미지, 그림, 로고스의 반영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이미지를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보는 것이 인간의 윤리라면 쓰인 책 속에서 쓰이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것 또한 인간의 윤리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에게 이런 식의 윤리는 적용 불가능하지요. ‘디지털 대전환’으로 인해 마모되어 가는 인간의 절대적 본질을 확언해 준다는 점에서 『백치』는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필독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놀랍도록 복잡하고 아름다우면서 슬픈 소설이야말로, ‘딥러닝’을 통해서는 창조될 수 없는 예술품의 전범으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