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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이념대립의 냉전을 넘어, 문화냉전의 새 지도를 그리다 본문
5면 저자와의 대화
이봉범, 『한국의 냉전문화사』, 소명출판, 2023.
이념대립의 냉전을 넘어, 문화냉전의 새 지도를 그리다
Q : 선생님께서는 해방 이후 검열, 매체, 전향, 번역, 이념 등의 문학제도사를 냉전의 관계망 속에서 파악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계십니다. 이러한 문화냉전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첫 단독 저서를 출간하신 소감이 어떠신지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A : 연구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오랜 시간 이 길을 걸어오면서, 저는 늘 ‘문학 연구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스스로 던져 왔습니다. 저는 문학 연구라는 것이 과거 역사 속에서 잊힌 사람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들을 기억하고 복원하고 그들을 또 다시 역사 속에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 텍스트 안에는 역사에 기입되지 못한 이들의 기대와 좌절, 욕망과 분투가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 마음들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문학 텍스트의 안과 밖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검열, 매체, 전향, 번역, 이념 등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 문학을 연구하다가, 그러한 의제들이 모두 ‘냉전’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렇기에 저는 2010년 전후로 ‘냉전’이 인문사회과학계의 학술적 화두로 오르기 시작한 그 흐름 속에서, 그동안 집중적으로 연구해오던 문학제도사 연구를 ‘냉전’과 접목시켜 연구의 지평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 ‘냉전’이라는 키워드야말로 한국의 문화와 문학의 존재 방식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고, 그러한 문화·문학의 심층에 저류하는 ‘냉전’의 힘을 추적하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존재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이 책은 그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논문 몇 편을 묶어 책으로 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서 그동안 책을 내지 않았습니다만, 지금 시점에서 여태까지 해 왔던 작업들을 한 번 정리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책으로 묶어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빈틈이 많아 부끄럽습니다만, 그래도 이 책을 계기로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대해서도 좀 더 새로운 시각을 갖고 천착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Q : 이 책은 ‘냉전’의 세계적 확산 아래 한국의 문화·사상이 어떻게 굴절되고 변용되었는지를 보여준, 한국의 냉전문화사에 대한 개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책의 구성 역시 3부(제 12장)라는 매우 방대한 형식으로 짜여져 있는데요. 각각의 부·장의 역할과 그 안에 틈입해 있는 ‘냉전’의 구조적 역학을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냉전체제의 범세계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키워드로서 미국의 ‘원조’를 들고 계신데, 이러한 미국의 물적·지적 지원이 냉전의 틀을 구축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 이 책은 각각의 독립된 부와 장을 통해 한반도, 더 넓게는 동아시아의 차원에서의 ‘냉전’을 거시적으로 조감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한국에서 ‘냉전’이 작용했던 방식 자체가 워낙 복잡다단했기에, 그 굴절과 변용의 파노라마를 최대한 포착해 보고 싶어 크게 1부, 2부, 3부로 나누었습니다. 성긴 연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1부에서는 전후 냉전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 속에서 미국의 공적/민간 원조가 한국 냉전문화·학술의 제도화를 이루어낸 양상을 살펴보았고, 이러한 미국 중심의 문화 냉전이 냉전의 주변부에서 격전장으로 부상한 동북아시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더불어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 냉전 이데올로기의 횡단을 어떤 방식으로 감지하고 있었는지 조명해 보고자 했습니다. 2부에서는 『실패한 신』(The God That Failed)을 비롯한 서구발(發) 냉전 텍스트들과의 연쇄를 다루었습니다. 반공주의를 정당화하는 서구 지성의 ‘전향’ 텍스트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던 남한의 지식인들과의 접점을 만들어냈고, 반공주의의 정당성과 체제옹호를 뒷받침해주는 ‘심리전’ 텍스트로 기능했는데, 이는 한국 번역·수용 과정에서 냉전 정치성이 개입되었음을 증명하는 일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마츠모토 세이초(松本清張)의 『북의 시인』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았고요. 1960년대로 들어서면 냉전지역학으로서의 북한학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미국의 민간재단, 박정희 정권, 당대 학술계의 이해관계가 결합되어 한국학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흐름까지도 함께 다뤄 보았습니다. 3부에서는 한국 특유의 냉전 문화·사상이 어떻게 구축되고, 장기적으로 지속되면서 어떤 문화적인 영향력을 끼쳐왔는지를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한국사회 내부의 이념·진영 간의 갈등의 기원이 해방 직후 남북한 체제가 성립된 1948년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것과 관련하여 일종의 반란, 전향, 부역의 의제가 내부냉전의 기제로 작용하면서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입니다. 내부 냉전 구조를 톺아보면서,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이 난제들을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습니다.
질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해방 이후 미국의 물적·지적 ‘원조’가 정치·경제·문화 등 우리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입니다. 특히 문화의 영역에서는 민간재단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원조’가 기술, 제도, 인적 차원, 학술 인프라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이 ‘원조’는 항상 제공 국가와 그것을 제공받는 국가 사이의 비대칭성을 기반으로 작동됩니다. 당시 미국의 민간재단이 아무리 ‘비정치’를 내걸고 지원을 행했다 하더라도 결국 자본주의 진영의 안보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헌신한다는 미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는데 기여하는 등 국가의 전략적 목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한 건 분명한 사실이죠. 실제로 미국과 소련은 ‘원조’의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제3세계에 냉전 제국으로서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대해 왔습니다. 1950년대 후반에 가면 원조 자체의 실효성이 약화되고 재정적인 부담이 커지면서 일종의 차관 형태로 바뀌긴 합니다만, 이러한 형태는 여전히 미·소와 제3세계 간의 비대칭성을 증폭시키는 것입니다. 원조를 받는 나라는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든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냉전의 범세계성을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키워드를 ‘원조’라고 보았고, 그 ‘원조’로 인해 한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장기 지속되고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Q : 흔히 ‘냉전’이라고 하면 미/소의 두 구심점을 축으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분극화(polarization)’된 상태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실제로 이러한 이분법에 포함되지 않는 지대가 존재했고, 그 사실 자체가 “1950년대 냉전체제의 특수성”이라고 보셨습니다. 이렇듯 정치적 긴장과 완화가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지속되었는지 궁금합니다.
A : 말씀해 주신 대로, 냉전체제의 기본형은 군사력을 중심으로 한 미·소 양극체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체제가 1950년대에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세계적으로 파급·확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극화되고, 초점이 서유럽(베를린위기)에서 제3세계로 다변화되면서 국제적인 (신)체제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죠. 다시 말해, 신중국의 성립과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질서가 아시아지역으로 이동하는 동시에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양 진영의 극단적인 대립 질서가 구축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특히 국제전·이데올로기전이었던 한국전쟁은 냉전 제국이었던 미국의 정책에 큰 변화를 추동해 이전의 정치·외교적 차원의 봉쇄뿐 아니라 군사적 차원에서의 봉쇄를 더욱 강화했고, 이에 소련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냉전은 전세계를 무대로 한 미·소의 전략적 경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국제적 긴장이 완화되는 흐름도 대두하고 있었습니다. 1953년에는 미국과 소련 모두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여 양국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고, 사회·과학·문화적 교류가 재개되는 등 미·소관계가 다소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죠. 또한 이전부터 계속되었던 양국 간 핵무기 경쟁, 원조경쟁 등으로 인한 재정 부족도 타협과 긴장 완화의 필요성을 증대시켰죠. 이처럼 냉전체제는 단순히 미·소의 대립으로만 사유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공존’하고 있던 양가적인 체제였습니다. 1950년대 또한 반공그룹/공산주의그룹 등이 각기 뚜렷한 자기세력을 갖고 분립한 가운데, 개별국가 간의 연대가 활발하게 추진되고, 냉전과 열전의 확대와 더불어 긴장완화 추세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데탕트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 반공주의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 강조, 일본과의 협력 혹은 견제, 비공산중립국과의 교류 등의 냉전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를 더욱 복잡다단한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탈식민’, ‘탈냉전’의 조류 속에서 우리 사회 내부에 깊이 뿌리내린 냉전적 사고를 파헤치는 일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현시점에서 문학 연구자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의 연구자들은 어떤 시각으로 냉전이라는 시기를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A : 동시대 한국 사회를 보면 여전히 반공, 멸공 등의 담론들이 사회 내부적인 적대와 갈등을 유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시다시피 냉전이 해체된 지도 꽤 됐고 이제는 남북 관계에 대해 열린 자세로 접근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조성이 된 마당인데, 이렇게 원색적이면서 객관성도 부족한 ‘반공 논리’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러한 반공의식은 특정한 세력의 우발적인 욕망으로만 보기 힘든, 우리 사회가 아주 오랫동안 축적해 온 냉전과 분단의 어떤 미망(迷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해방 직후에 형성된 내부 냉전 구조와 사회적인 배제 메커니즘이 장기 지속되면서 우리 심성의 차원으로까지 틈입한 이 냉전의 왜곡된 흔적들을,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극복해 내야하지 않을까요. 연구자들부터가 이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좀 더 민주적인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정리 : 조수아 기자 lovelove99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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