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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선생님, 그럼 아도르노가 방법론이 되는 건가요?” 본문

2면/강사 칼럼

“선생님, 그럼 아도르노가 방법론이 되는 건가요?”

Jen25 2025. 3. 4. 23:43

“선생님, 그럼 아도르노가 방법론이 되는 건가요?”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물정 모르는 초임 강사가 첫 강의를 앞두고 고민했던 건 : ‘아름다운 논증과 명료한 공박의 S교수인가, 중언부언 나선형 문장으로나마 핵심을 간취하는 Y교수인가.’ 그는 강단에 오른 자신이 따를 만한 모델을, 학부 시절 매혹되고 또 실망했던 교수들에 비추어 이리저리 상상해봤던 것이다. S-모델은 아카데믹하고 명료하지만 실천적 충격을 주기 어렵고, Y-모델은 논증의 표피를 뚫고 들어가 욕망까지를 건드리지만 무책임한 ‘모호한 심오함’으로 빠져들기 쉽고…물론, 그런 고민은 갓 칼을 든 요리사가 분자 요리냐 장인의 손맛이냐를 놓고 택일을 고민하는 격임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된다.

  나는 지난 학기에 강의를 시작한 ‘초보’ 강사다. 첫 강의 전, 학생들 앞에 선 내 모습을 거듭 시뮬레이션해 보며 전전긍긍해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학생 발제가 주를 이루는 작품 읽기 수업이었는데, 내가 수백 번 그려본 건 사실 발제문에 대한 코멘트는 아니었다. 작품을 일단 꼼꼼히 읽는(close reading) 것이 발제문에 부과된 유일한 요구였고, 그것이 잘 지켜졌다면 발제문은 아주 구체적인 기술(description)과 그에 근거한 추론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었므로, 피드백의 자유도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그것은 S-모델에 능숙하다면 일단은 크게 걱정할 것 없는 영역이었다. (물론 나는 능숙하지 못했으므로 S를 의도하면서도 종종 Y로 빠져들어 자괴감을 느끼곤 했지만)

  한편으론 내용에 관계 없이, 발제문을 놓고 학생들과 자유로이 대화하는 건 불안하다기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일테면 과제로 단 한 문장을 제출한 당돌한 학생이 있어, ‘문장 이상형 월드컵’이라는 명목으로 매우 다른 스타일의 글들을 나란히 놓고 어느 쪽 문장이 직관적으로 그의 취향에 더 가까운지 물어본 적이 있다. 저명한 승려 함허 득통 선사와 분석철학자 가렛 에반스(Gareth Evans)를, 또 미국인 노앨 캐롤(Noell Carroll)과 독일인 아도르노를 나란히 두고 보는 식이었다. 그는 에반스와 캐롤의 편이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매혹되었던 문장들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는 경험은 그 자체로 대단히 짜릿한 것이었다.

  골치가 아팠던 건 이론 강의였다. 신비평에서부터 문화연구로 이어지는 흐름을 개괄하는 이론 강의. 가볍게 훑어볼 요량으로 초반에 배치해 둔 그 강의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론을 비롯 다양한 글을 읽고 정리, 논증화 한 후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대학원생의 본업이라 할 만하지만, ‘가르치는 이’의 입장에서 그것을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확연히 다른 문제인 듯했다. 그 곤란은 이론 자체의 어려움, 혹은 이론 정리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이론의 핵심적인 문제의식, 달리 말해 그 이론의 주창자가 그토록 핏대 세우게 되는 바로 그 이유를, 그 이론을 처음 접하는 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확연히 이해하게끔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 곤란이었다. 치기일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나는 그들에게 (강의실을 떠나면 곧 휘발될) 명제 한 다발을, 즉 ‘방법론’으로 이용될 수 있는 정리들(‘슬픈 학문’, 아도르노)을 안겨주기 보다, 이론의 중핵을 ‘감지’할 수 있게끔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솔 크립키(Saul Kripke)는 비트켄슈타인에 관한 그의 유명한 연구서 『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에서, “철학적 이론들…보다는 학생들이 이 문제를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아름다운 논증과 더불어 ‘겹하기(⊕)’라는 유명한 예시를 통하여 그것을 시도한다. 또는, 아도르노는 도덕철학에 관한 그의 ‘1963년 강의’의 ‘제 1강’에서, 그의 도덕철학의 핵심이 함축된 강렬한 문장을 학생들에게 곧장 들이민다. (이론적 예측과는 상관없이) “…바꾸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런 것…도덕적 행위가 갖는 비합리적 계기(가 있습니다)…고통스럽다면, 끔찍하게 고통스럽다면 그것이야말로 실천입니다….” (괄호 안은 인용자) 황당하게도 나는 첫 강의에서, 그것도 긴 흐름을 훑는 개괄적인 이론 강의에서 그런 걸 꿈꿨던 것이다.

  물론 나는 대가가 아니며, 결과는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바 대로였다. 즉, S와 Y의 조화는커녕, 논증적으로 불분명하고(~S), 핵심을 간취하지 못한 채 공회전만 하는(~Y) 이론 강의(즉, ~S∧~Y)가 되어버린 것이다.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아직 강사로서 완전한 ‘초보’인 것이다. 강의의 본질적 딜레마 운운 우기고 싶지만 그건 아직 한참은 이르다. 틈은 있을 것이다. S와 Y, 그리고 크립키와 아도르노를 비롯 내가 보고 듣고 사랑한 많은 선생들의 목소리를 길잡이 삼아 교실에서의 내적 변혁을 꿈꾸는 것, 그것이 단지 비웃음 살 일만은 아닐 것이라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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