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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점성술과 현미경 본문
점성술과 현미경
한 학생이 물었다. “예술을 ‘이해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당황했지만, 부연을 유심히 들어보니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작품에 대한 진술이 참/거짓이 될 수 있는가? 아니라면 작품은 ‘앎’ 즉 이해의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 작품을 감상하고 그에 대해 말하는 행위는 도대체 무엇인가? 점성술인가? 그는 기계공학과 학생이었다. 사심 없이, 나는 매우 훌륭한 질문이라 생각했다. 여하간, 이를 ‘점성술 질문’이라 부르도록 하자.
전통적 인식론에 따르면, 지식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justified true belief)’으로 정의된다. 요컨대 어떤 이가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는 그것에 대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을 지녀야 한다. 그런데 작품에 대한 진술은 일견 참도 거짓도 될 수 없어 보인다. 이에 더해 그것은 증거에 의해 정당화되기도 어려운 것 같다. 따라서, 작품에 대한 진술은 지식일 수 없다. ‘점성술 질문’이 형성되는 과정을 ‘명료화’해 보자면 아마도 이럴 것이다.
물론 여러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점성술 질문’이 인문학도들의 마음 한편에 여전히 지양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문제 제기는 좀 새삼스런 데가 있다. 1937년, 후설은 이미 이에 대해 길게 논한 바 있지 않은가. 하지만 오래된 문제가 곧 해결된 문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는 ‘인문학 연구자’인 나를 코스웍 내내 괴롭혔던 문제이기도 했다. 작품 한 편을 놓고 밤새 끄적이노라면 내가 연구자인지 점성술사인지 당최 알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생산하는 글들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많은 연구자가 이 ‘점성술 질문’의 공포에 시달리는 듯했다.
그렇다고 나는 ‘정당화 불가능한 것’ 그 자체의 우월성 주장에 쉽사리 동의할 수도, 반대로 ‘자료에 대한 경험 관찰’이라는 교리에 복무할 수도 없었다. 두 영역은 과학에 대한 르쌍티망을 서로에 대한 증오로 대리 표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후자는 전자를 ‘문학주의/신비주의’라 비웃었으며, 전자는 후자를 ‘실증주의/과학주의’라 매도했다. 지금 나는 두 영역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사이에서 내가 갈팡질팡했고, 자주 의기소침해졌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안쓰러웠다. 말해 뭣해 가뜩이나 풀죽을 일 많은 대학원 생활, 그나마 연구자를 지탱해 주는 연구에 대한 자기 확신이 뿌리째 흔들렸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야말로 “유클리드의 초점”이 “도처에서 인문의 뇌수를 마른풀처럼 소각하는” 꼴이었다. (이상, 「선에 관한 각서2」)
이쯤 되면 내가 이 진퇴양난을 ‘지양’해 나가는 서사가 등장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객관성’을 위해 우선 ‘실증주의 논쟁’의 주축이었던 포퍼와 아도르노를 살펴보자. 격렬했던 사상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에게 사유란 공히 논리와 직관의 긴장을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당화’는 그것으로 대신하고, 이후 나는 내 주장을 ‘정당화 없이’ ‘신비주의’ 풍으로 제시할 것이다.
먼저, 아도르노는 포퍼를 ‘낡은 객관주의자’라 비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박한 평가인 듯하다. 일테면 포퍼는 『추측과 논박』에서 피타고라스가 사이비 교주였음을 언급하며, 그의 ‘정리’의 근저에는 수에 대한 ‘신앙심’이 깔려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포퍼는, 관찰에서 이론으로의 상승이 ‘귀납’이 아닌 과감한 ‘추측’에 의해 이루어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포퍼에게도 열정(심지어 종교적인 열정)과 상상력은 곧 지식의 구성요건이 되는 셈이다.
다른 한편, 포퍼는 아도르노를 ‘지식인을 위한 아편’을 제조하는 수사가(修辭家)라 조롱한 바 있다. 물론 이도 사실이 아니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관념론을 거부한 이후에도 철학은 ... 사변 없이는 곤란에 처한다”고 강변하면서도, 곧바로 “사변철학은 ... 논리정연성에 대한 충실성을 요구한다”고 잇댄다. 요컨대 ‘정당화’는 추구되어야만 하나, 그것은 일직선적 논증이 아니라 표현의 사변적 전개 속에서 간접적으로만 획득된다는 것이다. 진리는 논리정연성과 더불어 '체험'과 '서술'(속에서의 자기소멸)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수사는 그렇게 진리에 기여한다.
따라서 “빛을 받은 구름의 가장자리에서 섬광이 영원히 머무는 듯해 보이는” 환상을 모사하고자 하는 예술 작품은, “언뜻 체험한 환상만큼이나 ... 덧없는 한에 있어서” (『미학이론』) 진리에 관여하게 된다. 자, 이것은 ‘신비적’인가? 그러나 바로 그 신비에 대한 공포, 냉소와 거부감의 근원을 명확히 알아차리는 데 인문학의 활로가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이렇게 멋스런 대답을 하고 싶었는데, 공대 학생에게는 그만 영 횡설수설해 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늘 그랬듯 점성술과 현미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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