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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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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면/강사 칼럼

프로페셔널이자 프롤레타리아로서

Jen25 2024. 9. 10. 14:07

 

프로페셔널이자 프롤레타리아로서

 

어느 시간강사

 

처음 강의료가 입금되었을 때 들었던 솔직한 생각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기 수입이 많지 않은 인문학 연구자에게 있어 강의료는 살림에 쏠쏠한 보탬이 될 만한 돈이었다. 그러다가 시급이 얼마인지 들은 지도교수께서 10년 전 금액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안타까움을 표하셨을 때에야 비로소 그게 많지 않은 돈이란 것을 알았다. 대체 나는 얼마를 생각했던 것일까? 말로만 듣던 강사의 급여가 드디어 나의 급여가 되었을 때, 어떻게 그것이 생각보다 많다고 느낄 수 있었을까? 강의에 임하는 내 생각의 그릇은 그토록 작았던 것일까

야구는 잘 모르지만, “돈을 받는다는 것은 프로라는 것이라는 김성근 전프로야구감독의 유명한 말은 어느 분야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을 받고 강의를 하는 것이니, 마땅하게도 강사는 강의의 프로. 그러나 김 감독의 말이 돈을 더 많이 받을수록 더 프로인 것이라는 전제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교수가 강사보다 더 많은 돈을 받으니 연구가 아닌 강의에 있어서도 더 프로에 가깝다는 공식은 성립할 수 없다. 강의를 맡았고 돈을 받는 이상 모두가 똑같은 프로다. 강의에 요구되는 책임이 돈의 액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강의료라는 것은 대학이 강사의 지식이나 열정과 교환하는 대가가 아니다. 연구자가 평생에 걸쳐 가꿔 온 지식과 열정이라는 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매길 수 없으니 처음부터 나는 그 을 계산하지 않았다. 돈은 강의를 나의 업으로 만들어주는 하나의 표지일 뿐이다. 따라서 강의료에 대한 내 터무니없는 첫인상은 오히려 강의를 대하는 내 생각의 그릇이 컸던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나는 내 강의가 대학에 의해, 나아가 대학이 지급하는 급여의 액수에 의해 평가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오롯이 학생들의 몫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대학에 의해 이용당하기 쉬운 것 또한 사실이다. 학문과 교육을 다루는 성역에서 돈을 논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학생들의 사정을 내세워 강사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한국 대학의 유구한 전통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학의 잘못이지 태도의 문제는 아니다.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강사들의 고충은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강의를 맡고 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조언이 너무 무리하지 말고 돈 받은 만큼만 해라, 그러다가 정작 네 공부 못 하면 나중에 죽도 밥도 안 된다.”라는 말이었고, 후배를 걱정하는 선배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지극히 감사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담고 있는 현실에는 동의할지언정 그 말의 당위성에는 여전히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일터로 삼은 곳은 애초에 돈 받은 만큼을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철저히 계산하여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이 나중에 전임교수가 되면 더 받는 만큼의 열정과 태도를 갖출 수 있는가? 정확하게 계량된 열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학생들 앞에 서는 일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우리가 프로페서가 아닌 것이지 프로페셔널이 아닌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당연하게도 우리 또한 프롤레타리아이기에, 노동에 값하는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의 노동을 폄하할 이유는 전혀 없다. 강의는 여전히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신성한 노동이자 학생이라는 이름의 미래와 만나는 성스러운 작업이다. 대학은 강단을 성역으로 가장(假裝)하여 우리를 기만할 수 없다. 강단은 처음부터 성역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성역에서 일하는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러니 대학에 맞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정과 책임을 제공된 대가에 맞추는 것은, 대학의 자본주의 논리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에 같은 자본주의 논리로 대응하는 모순에 빠지는 일이다.

이 땅의 모든 강사들이 지금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부디 스스로를, 자신의 강의를 평가절하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얼마를 받건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 ‘프로페셔널로서 그 위대한 일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수행했을 때, ‘프롤레타리아로서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되는 그날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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