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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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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면/강사 칼럼

소통의 이면과 진정성

Jen25 2024. 4. 4. 16:34

소통의 이면과 진정성

 

어느 시간강사

 

오랫동안 학업을 같이 해온 동료와 대학 강단에 서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말해준 것 중 특별히 인상 깊었던 것은 수업 시간 학생들의 태도와 집중력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이버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나에게 학생들의 실질적 수업 태도는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요소이다. 그동안 전혀 고민의 대상조차 될 수 없던 사항이라서 그랬는지 왠지 모르게 더 관심이 갔던 듯하다.

그는 나처럼 처음으로 강단에 선다는 설렘과 걱정을 동시에 안고 있는 초임 강사이다. 수도권을 멀리 벗어나야만 하는 통근을 감수하면서까지 야심차게 시작된 첫 강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나 그렇듯 모든 일이 생각만큼 이상적일 수는 없지 않은가. 열심히 준비한 강의도 누군가는 경청하겠지만, 어떤 학생은 전혀 듣지 않은 채 그저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이 뻔하다. 그 역시 딴짓을 하는 학생들이 자꾸 신경 쓰이는 것이 스스로 꽤 불편하다고 하였다. 대학 수업이 고등학교 입시학원처럼 선생이 재깍재깍 지적할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다보니까 아직 대학 강단보다 학원 강의가 더 익숙했던 그에겐 모종의 심리적 불편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라면, 사이버 대학의 수업 방식은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교수자 입장에서 학생들의 출석 여부가 그냥 수치로서 나타날 뿐이다. 예컨대 1주차 수업을 102명 중 98명이 수강하였고, 오픈된 지 얼마 안 된 2주차 수업은 102명 중 48명이 현재 수강하였으며, 2주차 퀴즈의 응시율과 정답률은 대략 몇 퍼센트쯤 되는지 등등 일종의 사실 적시격인 내용만이 나에게 제공되고 있다. 실제로 어떤 학생은 온라인 강의를 여러 번 돌려가며 열심히 수강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학생은 그저 컴퓨터에 재생만 시켜놓고 낮잠을 청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그런 (있을지 확실하진 않으나 웬만하면 무조건 있을 것 같은) 학생이 강의 도중에 의식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일단 적어도 강의를 찍는 와중에는 전혀 그 부주의한 학생이 눈에 보이지가 않기 때문에, 수업에 어떠한 질적 영향도 주기 어렵다는 말이다. 나는 내 수업의 페이스를 꾸준히 지켜 가면 되는 것이고, 나의 말이 몇몇 학생들에겐 각별한 울림이나 자극으로 남기를 바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 사이버 대학이 학생들과 상호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사이버 대학은 과목별 게시판을 통해 학생들과 훨씬 적극적인 소통이 가능한 것 같기도 하다. 이 대학 특성상 40-70대를 아우르는 장년층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인데, 소위 구수한 이름의 어머님학생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글을 남겨주시기도 한다. 한번은 이런 글이 게시판에 올라온 적 있다. 그 학생에 따르면, 자기 자신은 만학도로서 얼마 전에 용기를 내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내 강의를 듣고 풋풋했던 고등학교 때 생각이 잠시 스쳤다는 것이다. “저절로 나이를 잊은 것 같다라는 말씀의 진심이 나에게는 꽤나 큰 파문을 가져다주었다. 그동안 강의를 준비해온 보람과 앞으로도 열심히 그 마음에 보답을 드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함께 내 속에서 발아했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사실 그런 말을 남겨주시는 분이 한두 분이 아니기도 하고, 뒤늦게 학업을 시작하게 된 열정마저 다양하기에 내가 더욱 열심히 해내야만 한다. 어떠한 SNS도 하지 않던 내가 게시판에 답글을 달고 있을 줄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그래도 나의 말이 누군가에겐 힘과 용기가 되고, 때론 어딘가에서 활용할 수 있는 매력적인 지식이 되며, 또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이보다 강사로서 좋은 일이 있을까 싶다.

언제나 3월은 봄이고 새 학기의 시작이다. 나는 한동안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살아왔다. 3월이란 시기가 대학교 신입생으로 입학하였을 당시에는 온갖 설렘으로 가득했었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차 권태로워 졌고, 대학원을 수료했을 시점쯤에 이르러서는 방학과 거의 다를 바가 없어졌을 정도였다. 해마다 반복될수록 더 무감각해지고 별로 와닿지도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 강단의 서게 되니 3월이라는 시간이 다시금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나를 위해서도, 나처럼 어느덧 강사가 된 학업적 동료들을 위해서도, 다양한 연령대의 내 학생들을 위해서도, 그 모두에게 귀중하고 용기 있는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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