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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면/강사 칼럼

많이 배웠습니다

Jen25 2024. 6. 13. 12:53

많이 배웠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아마도 내가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이래 가장 많이 사용한 인사말일 것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배우는 것이 직업이었으니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인사말이라 하겠다. 그리고 가르치는 것 또한 직업이 된 지금은 오히려 일방적으로 배울 때보다도 더 자주 쓰게 되는 말이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꺼내기에는 전혀 새롭지 않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르치는 일에 있어 만고불변의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이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는 교장어학(敎長於學)’, 즉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보다 더 많이 성장한다는 법칙을, 나는 강의를 나갈 때마다 새삼스레 확인하곤 한다.

이번 학기에 내가 맡은 강의는 서사이론을 통해 소설과 영화를 읽는수업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518 기념일이 있는 주차에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2014)를 읽게 됐다. 워낙 좋아하는 작품인데다 책임감 있게 다뤄야 할 작품이기도 한 만큼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열심히 강의를 준비했다. 7개로 이루어진 장에 각기 다른 서술자를 배치하고, 심지어 ‘2인칭 서술자라든가 유령 서술자등을 실험하는 이 소설은, 그만큼 다양하고 중층적인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19805월 광주의 의거(義擧) 혹은 비극을 어떻게 기억해야할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걸작이다. 혹여 그러한 고민들 중 하나라도 놓칠까 하는 걱정에, 나는 장별 서술자의 특수성을 분석할 수 있는 서사이론과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기억 담론까지 모두 정리해둔 후에야 마음을 놓았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학기 최고의 수업이 될지도 모른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마치 화살을 잔뜩 쟁여 둔 사냥꾼과 같은 든든한 마음으로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막상 수업이 시작되자 나는 내가 준비한 모든 것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학과와 강의의 특수성 때문인지 내가 맡은 수업에는 70세를 넘긴 만학도가 두 분이나 계신다. 그리고 그분들은 그저 수업을 열심히 들으실 뿐 여태껏 말씀을 아끼고 계셨다. 한창 배울 나이인 젊은 학생들의 발언 기회를 뺏고 싶지 않다는,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사려 깊은 태도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던 두 분이 일제히 침묵을 깨셨을 때, 나는 준비한 것을 얼마나 충실히 전달하느냐의 문제는 최고의 수업을 판별하는 문제와 특별한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분들은 당신들이 보고 들은 광주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말씀하셨다. 그것은 소년의 온다에 등장하는 일곱 명의 서술자와는 또 다른 방식의 기억이었다. 소년이 온다는 그저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그 무겁디무거운 절망을 감득하며, 어떠한 위로나 이해의 말도 건넬 수 없는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러한 소년이 온다를 읽을 때와 같이 나는 그분들의 말씀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덧붙일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결국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한강 작가나 내가 그토록 고민했던, 기억이 분유(分有)’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준비했던 내용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전달했나 싶다. 흘러넘치는 그분들의 기억 앞에서, 내가 준비한 내용은 무의미하지 않을지언정 여전히 탁상공론이었다. 그게 부끄러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던 것도 같다. 두 분이 포문을 연 뒤로 다른 학생들도 너도 나도 입을 열었다. 각자의 광주가 내게 흘러들어왔다. 본 자의 광주, 보지 못한 자의 광주, 기억할 수밖에 없는 자의 광주, 기억해야만 하는 자의 광주……. 늘 학생들의 몫이었던 침묵이, 그래서 늘 깨기 위해 안달복달했던 그 침묵이 내 몫이 된 날이 가장 열심히 강의를 준비한 날이라는 것은 기막힌 역설이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수업은 최고의 수업이었다. 선생이 학생으로부터 배우는 수업, 그렇기에 선생이 학생보다 더 많이 성장하는 수업, 이기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거야말로 선생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수업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선생이기에, 끝없이 가르쳐야만 하는 사람이기에 언제까지고 성장하고 싶은 존재일 테니 말이다. 이번 수업은 이제 끝나지만, 다시 한 번 많이 배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가르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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