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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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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면/강사 칼럼

나는 지방대 강사다

Jen25 2024. 12. 27. 11:06

나는 지방대 강사다

 

내가 출강하는 학교는 이른바 ‘지방대’이다. 강의를 맡게 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KTX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에 탑승했을 때 쉽게 잠에 들지 못 한다. 야심차게 목베개와 담요까지 준비하고도, 하루 4시간이 넘는 이동시간 동안 전혀 휴식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강단 위에서 연극을 하는 배우처럼 서너 시간씩 쉼 없이 떠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지방으로 강의를 다니면서 기나긴 이동 시간보다 훨씬 더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지방대 학생들의 학업 수준이나 태도에 대한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처음 강의를 맡고 한 동안은 푸념과 하소연의 시간이었다. 강사가 하소연 할 내용이야 뻔했다. 학생들이 수업을 듣지 않고 스마트폰만 하거나 아예 잠을 잔다든가, 논의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어렵다고 불평만 한다든가, 따위의 내용들이었다. 오히려 뻔하지 않았던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 신기할 정도로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원래 공부가 익숙지 않은 지방대 학생들이니 어쩔 수 없다, 나중에 서울에서 강의를 하면 훨씬 나을 테니 거기서 너무 무리하지 마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네는 조언의 요지였다. 내가 먼저 판단하기 좋은 대상을 제공했고, 그들 역시 위로와 격려의 취지로 건넨 말일 터이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람들은 너무나 쉽사리, 그리고 확고하게 본 적도 없는 나의 학생들을 ‘지방대’라는 기준 하나로 판단했다. 

내 푸념이나 하소연을 들을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인문학 전공자이며, 평균을 훨씬 웃도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공통된 반응은 더욱 문제적이다. 그들이 답지 않은 ‘쉬운 판단’을 내리는 이유는 약자에게 공감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지방대생의 ‘지방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범주에 아직 포함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노력한 사람들의 능력주의’가 깔려 있다. 본인이 학창 시절에 공부를 안 해서 지방대에 가게 된 것까지 사회적 약자로 인정해 줄 필요가 없다는 논리이다. 물론 ‘입시지옥’으로 정평이 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능력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논리는 이미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런 비판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나라에서 가장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에게조차 쉽사리 이해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지방대 학생들은 명증하게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인문학 수업을 맡고 있는 나는 강의 중에 좋은 공연이나 전시를 추천해 줄 때마다 스스로에게 해소할 수 없는 모순을 느낀다. 나와 같이 왕복 4시간을 기차에서 허비해야 그 공연이나 전시를 볼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다.

해방 이후 최대의 지식인 종합 잡지로 알려진 <<사상계>> 1962년 7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지방대생 독자의 의견이 실려 있다. “매호마다 지면을 점하는 그 교수님들이 거의 전부가 서울의 각 대학에서 강의하시는 분들이라는 것에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제안이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현재, 2000년도 이후 폐교된 17개 대학교가 모두 지방대라는 사실(이석주 기자, 「2000년 이후 17개 폐교대학 모두 지방대…정부지원 무색」, <<국제신문>>, 2024.6.15.)은 이러한 현실이 얼마나 유구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공공기관‧공기업 등에서 주도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지역인재전형’과 같은 정책도 물론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결국 우리들의 인식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가르쳐야 할 선생이 학생을 ‘미리’ 판단해버리는 것은 금물이다. 하물며 ‘지방대’라는 합리적이지도 않고 일관적이지도 않은 기준을 가지고 학생들을 미리 판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당장 우리의 일자리를 축소시키는 어리석은 일이며, 근본적으로는 소중한 미래를 내다버리는 몰염치한 일이다.

종강을 바라보는 12월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4시간씩 뜬눈으로 KTX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것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똑같이 잠 못 드는 시간임에도 내려갈 때보다 올라올 때가 훨씬 덜 힘들다는 사실이다. 올라올 때는 강의 중 학생들이 던진 ‘좋은 질문’을 곱씹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간이 아무리 힘들지언정, 나는 그렇게 힘들게 가야만 하는 곳을 그저 ‘거쳐 가는 곳’으로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지방대 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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