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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마주침의 사건은 계속되어야 한다. 본문
염동규
문학평론가
한국노동운동사에 있어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한국전쟁 이후 1960-70년대 내내 노동운동이 불가능하다시피 했던(1950-60년대 대한조선공사 노조의 투쟁과 같은 인상적인 예외를 제외하고) 한국에서 노동운동 및 노학연대의 불씨를 당겼고, 사후 5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진보적 대중에게 큰 울림을 준다. 전태일의 일기, 수기, 편지를 모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와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은 이와 같은 전태일의 생애를 모두에게 알리는 데 지울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 깊지만, 오늘날의 노동 현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크나큰 실천적 함의를 던져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서는 ‘사상가로서의 전태일’, 그리고 노동자 전태일의 삶에 대한 ‘번역적 실천’으로서의 전태일 평전을 다뤄보고자 한다.
사상가로서의 전태일에 대해 전태일 평전의 저자인 조영래는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태일의 사상은 각성된 밑바닥 인간의 사상으로서, 동시대 한국사회에 대한 완전한 거부와 근본적 개혁을 표현한 사상이다. 이와 같은 조영래의 간결한 정리는 파멸적인 현실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던 전태일이 노동자로서의 생생한 경험 끝에 모든 억압받는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인간 선언’을 하게 되었다는 각성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조영래 역시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전태일의 ‘인간 선언’이 갖는 내용은 단순히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엔 모자란 감이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전태일의 일기에 “저 혼자 가장 인도주의자인 척 빠른 입을 나불거리고 지금은 나 혼자많이 안이한 자리에 안도의 한심을 쉬고 기회주의자의 본심을 혼자 다 털어놓[는]… 부르죠아”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 나타나 있음을 보면, 전태일은 휴머니즘의 언어가 가질 수 있는 기만성을 간파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둘째, 전태일은 인간에 대한 신뢰 및 인간적 가치를 향한 호소와 더불어 ‘인간을 넘어서는 가치’로서의 신을 준거 삼고 있었다. 전태일이 쓴 소설 초안에는 “인간의 힘으로, 생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계는 지나갔다. 신을 의지하고, 신의 율례와 법도를 행하는 것많이 인간이 해야 할 급선무”라면서 “단일신 여호아”에 의탁하는 문장이 나타나기도 하고, “부한 자”와 “빈한 자” 사이의 사회적 분할을 비판할 때 신의 뜻에 맞춰 매주의 안식일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타난다. 이러한 전태일의 언급은 그가 말하는 ‘인간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보증하는 근거가 인간 그 자신 쪽에 있다기보다는 ‘신’에게 있다는 관점으로 읽히는데, 그러면서도 “인간은 죽지 않는다”며 당시 조건으로선 불가능에 가까웠던 사업 계획을 세워본다는 점을 보면 전태일의 ‘휴머니즘’은 인간적 가치에 대한 단순한 재확인이 아닌 신을 경유한 인간(으로부터)의 초월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전태일이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에 착안하여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나의 전체의 일부”로 명시하고 있음까지 고려한다면 전태일이 갖는 사상가로서의 단면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태일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 독자의 입장에서도 전태일이 사용하는 언어를 직접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전태일의 글쓰기는 표준화된 교육을 거쳐서 나타난 글쓰기가 아니라 노동자로서의 삶과 고민을 노동자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므로 표준화된 교육의 세례 속에서 자라난 글쓰기 관습에 익숙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수기에 나타나는 언어들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이 갖는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평전은 전태일의 수기에 나타난 삶의 경험들을 언어·논리·감정 등의 차원에서 독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언어로 번역해주고 있다. 쓰이고, 출판되고, 유통되는 과정 하나하나가 감동적인 이 책은 전태일의 삶을 단지 객관적인 시선에서 독자들에게 중계하는 수준을 넘어 화자 조영래가 직접 등장하여 전태일 삶의 한순간 한순간을 곱씹어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문장들로 엮여, 독자들이 전태일이라는 ‘타자’와 대면할 수 있는 만남의 장을 제공했다. 전태일의 삶이 수고보다는 전태일 평전을 통해 알려졌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는 전태일·조영래가 번역을 매개로 만난 마주침의 자리가 만들어낸 운동의 흐름이 오늘날의 진보적 연구자들에게 큰 시사점을 안겨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정말로 진보파라면, 전태일의 삶을 단지 학술 연구의 대상으로서만 소비할 수는 없다.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전태일과 마주침의 장소들을 구성해나감으로써 전태일의 삶이 결정적으로 말하려고 했던 바로 그것을 실천하고 갱신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와 다른, 우리에 대해 낯선 저 타자들의 말을 번역하고, 또한 그들에게 우리의 말을 번역함으로써만이 우리는 조영래와 전태일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마주침의 사건을 과거의 옛일로 대상화하지 않고 오늘의 자리에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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