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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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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부성주의와 깨지 못한 슬픈 꿈들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5. 29. 12:04

- 염동규 (문학평론가)

 

 

  아버지 없는 부성주의와 깨지 못한 슬픈 꿈들

 마크 피셔, 박진철 역, 『자본주의 리얼리즘』, 리시올, 2018.


  영화, 버라이어티 TV쇼, 광고, 사회비판적 성격을 지닌 콘서트, 문학 작품 등의 텍스트들을 종횡무진하며 전개되는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탁월한 미학적 비판이다. 정말이지 피셔의 이 책을 읽노라면,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브로콜리너마저) 우리들의 삶이 뭐가 문제였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더욱이 제임슨, 지젝, 들뢰즈, 스피노자 등의 사유를 다양하게 참조함으로써 재치 있는 이론적 논변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 역시도 책 읽는 보람을 더해준다. 

 

  피셔에 의하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지으며, 나아가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기능하여 자본주의 이후를 도모하는 비판적 사고를 질식시키는 “분위기”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비판적 사고를 교살하는 방법은 여럿인데, 대략적으로는 충동의 경제와 관료제의 확산이라는 두 키워드를 통해 불충분하게나마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라캉의 욕망과 충동 개념에 준거하여, 피셔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대상과의 단절을 삭제함으로써 충동의 경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를 구축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보고 싶은 컨텐츠에 대한 욕망보다는 끊임없이 링크를 따라다니며 클릭하려는 충동적 집착이 오늘날의 콘텐츠 소비의 핵심을 이룬다고 할 때, 이것이 ‘대상을 즐기는 시간’과 ‘대상이 부재한 시간’ 사이의 구분을 무화시킴으로써, 오로지 쾌락원칙의 한계 안에서만 끊임없이 뭔가를 즐겨야 하는 주체를 낳는다면, 포스트포디즘적 통제사회(들뢰즈)에서는 ‘통제받는 시간’과 ‘통제받지 않는 시간’ 사이의 구분이 무화됨으로써 끊임없이 통제받는 주체가 탄생한다. 충동의 경제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뒷받침하는 기구가 바로 관료제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의 진입과 함께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상징계의 폐지가 승전보처럼 울려퍼지고, 이른바 ‘스마트해지기’의 구호 아래에 포스트포디즘적 조치들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숨 막히는 관료제적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동자의 모습이 있다. 게다가 이러한 통제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이다. 가령 오늘날의 대학에서 교강사들이 하는 일들이 강의와 연구의 실질과 거의 무관하게, 강의를 어떻게 했으며 연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표상’들을 생산하는 데 상당 부분 할애되고 있듯이 말이다. 이러한 경향을 저자는 ‘시장스탈린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이로써 세계의 종말보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가 훨씬 어려운 곤경에 우리를 빠뜨린다.

 

  문제는 이와 같이 암울한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겠는데, 피셔의 해결책은 스피노자로부터 영감받은 이른바 “아버지 없는 부성주의”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주체와 대상 사이의 단절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에서, 이러한 흐름을 종결시킬 부성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십 년 전의 “완고한 아버지”나 “리스주의적 오만함”, 요컨대 푸코적인 훈육사회를 향한 복고적 회귀는 가능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으므로, 아버지 없이 부성주의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간의 정상 상태였던 충동적 도취 상태(=“슬픔의 정념들”)를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피셔의 그럴 듯한 사유에 대해 나는 이것이 여전히 충분하지는 않다고 말하겠다. 다양한 참조점에 근거하여 논변을 구성하면서도 자본주의 경제 위기 자체에 대해서는 자명하다는 듯이 말한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07-08년의 금융위기로 인해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리얼리티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저자는 말하지만(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도 너무 오래 들었다), 주류 경제학이 하는 일은 정확히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리얼리티를 불어넣는 일이 아닌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가 주류 경제학으로부터 여전히 리얼리티를 수혈받고 있는 한에서, 좌파적 실천 역시 리얼리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분야를 막론하고 정치경제학의 논변을 수혈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결고리에 집중하지 않는 한 후기 자본주의적 충동 회로를 끊어내는 새로운 부성주의의 도래란 요원할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버지 없는 부성주의라는 대안도 말장난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조디 딘과의 인상적인 대담에서도 이와 관련된 논전이 펼쳐지거니와 딘과 달리 피셔는 단호한 이름들을 정초하는 것이 적들에게 빌미만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이에 대해 딘은 이렇게 말한다. “왜 당신은 적이 우리를 비난하는 방식에 신경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개인적인 입장을 밝히라고 한다면, 나는 두 사람 모두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이의 눈치를 보는 아버지가 아이를 꿈에서 깨우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아직 들어본 일이 없어 초조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