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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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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세상 이미지에도 메시아의 문은 있는가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5. 12. 23:05

한상원 , 『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 , 에디투스 , 2018.

 

 

염동규

 

  이 책의 대략적인 설명 구도는 다음과 같다. 서고트 족의 로마 침략에 따른 역사적, 종교적 혼란을 만회하고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으로 체계화한 역사철학이것은 고통의 속세와 행복의 내세를 날카롭게 대립시키고 속세=역사로부터의 구원을유일하고 최종적인 구원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이 후대의 칸트, 헤겔, 맑스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세속화를 거치게 되고, 마침내 벤야민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맑스는 종교의 삭제로서 이해되는 세속화를 가장 급진적으로 몰아붙인 철학자이자 진보라는 종교에 다시금 빠져들고 만 철학자로 이해되고, 이에 반해 벤야민은 그의 가장 매력적인 단편인 역사철학테제가 보여주듯 신학을 다시 끌어들임으로써신학의 이와 같은 재고용을 저자는 수평적 세속화라고 부른다진보라는 환등상을 성공리에 극복한 철학자로 이해되고 있다. 저자의 기획은, 서구 역사철학을 이와 같이 일별함으로써 고통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관점을 획득해보겠다는 것이다.

  집권 세력의 헤게모니를 사수해야 한다는 강박이 수구 세력의 저항을 만나면서 국지적 의제가 진보 정치의 의제 전반을 과잉 대표하게 되는 오늘이다. 부각되지 못한 의제들은 나중을 기약하며 빛을 잃고 있는 듯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벤야민의 관점에 따라 진보의 환등상을 비판하며 정지로서의 역사철학을 옹호하는 작업에는 의미가 있다. 벤야민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거니와, 개인적으로는 책이 제시하는 선명한 논의 구도가 진보적 상상력의 다양한 결들을 좌표화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좋았다. 그러나 결국 진보의 환등상에 기댄 정치의 가능성에 비해 메시아적 정지를 강조하는 벤야민 연구자들의 입장이 특별히 더 나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나는 이 책의 기획을 마냥 수긍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지금 당장메시아적 정지가 있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응되는 정치경제학적 논변이 참조될 수 없다면 지금 당장은 조야한 윤리적 구호에 그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차치하고서도 책에 대해 몇 가지 비판적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문제점은, 한상원이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라는 단순한 대립구도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분화의 수준이 심화된 사회를 향한 논의가 이와 같이 단순한 대립구도에 의존하는 한 설득력을 갖는 논의로 여겨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벤야민을 맑스주의의 전통에서 읽어내야 한다는 주장도 잘 논증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세속화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한 아감벤의 벤야민 독해가 갖는 의의와 한계를 지적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벤야민과 맑스를 분리하고, 벤야민을 오로지 슈미트의 논적이자 카프카적 법 비판가로 환원하는 아감벤에게서 결국 현대성에 대한 거부는 추상적인 것에 머물고 만다.” 내 생각에 이러한 비판은, 한상원이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라는 추상적 구별을 유지하는 한 정확히 저자 자신에게도 향해야 하는 비판이다. 더욱이 맑스의 코뮨주의자유의 실현을 위한 거였다는 식의 막연한 논평에만 근거한다면, 맑스를 벤야민과 연결지어야 한다는 저자의 역설이 벤야민 사유의 정치화라는 목표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도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두 번째 문제점은 진보의 환등상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한국 사회에 대한 논의에 연결될 가망이 없어 보인다는 데 있다. 한상원은, 메시아적인 지금-시간(Jetzt-Zeit)에 대한 벤야민의 논변이 진보의 환등상가상으로, 비진리로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서, 진보의 환등상 속에 자리한 과거의 이미지(태곳적의 무계급 사회)”이것이 바로 메시아가 들어오는 좁은 문이다를 읽어낼 필요성을 적절하게 주장하고 있다. 많은 정치철학자들이 이론의 이름으로 현실을 재단하는 데 관심이 쏠려 있음을 감안하면, ‘진보의 환등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도 그로부터도래할 수 있는 메시아적 계기에 대해 말하려는 한상원의 모습은 긍정적으로 논평할 만하다. 하지만 남의 세상 이미지에도 메시아의 문은 있는가?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논평이 모여있는 결론부에서, 메시아적 시간과 진보의 환등상 사이에 놓인 변증법적 관계는 인상비평의 수준으로조차 논의되고 있지 않다. 그는 다만 지금 당장빈곤과 양극화와 불안정 노동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현실, 단식투쟁하는 유가족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쳐먹는 자들로부터 지옥의 형상을 읽어내고는 개탄할 뿐이다. 벤야민의 사유는 다만 그 개탄의 배경음을 이루고 있을 뿐, 우리 현실에 육박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진짜 중요한 문제는 벤야민의 사유와 한국 사회의 현실을 관념적으로 대질시키는 것이라기보다, 이러저러한 진보의 환등상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현실, 그것으로부터 도래할 메시아적 계기를 발견하는 일일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벤야민의 사유는, 그가 그렇게나 강조하는 과거의 이미지, 남의 세상에 외따로 존재하는 골동품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