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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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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정오, 공산주의의 밤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10. 13. 12:10

자본주의의 정오, 공산주의의 밤 - 조디 딘 저, 염인수 역,  「공산주의의 지평」 , 현실문화, 2019.

염동규 
문학평론가

 

 

 조디 딘의 경악스러운 이 책은 정치철학 이론서이기도 하지만, 우선은 하나의 죽비(竹篦). 지난 수십 년을 통과해 오며 많은 이론가들과 활동가들에게 암묵적인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던 신좌파적 개념 묶음들여기에는 개인(), 정체성, 정서, 자발성, 수평성 같이 대체로 보편성의 대척점에 위치할 만한 개념 묶음들이 해당된다공산주의의 이름으로 날카롭게 비판하고 재전유하면서, 진보 좌파를 자임하는 많은 이들이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공산주의에 대한 망각 혹은 두려움을 폭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보를 고민하며 이 책을 읽은 자라면 누구라도 이 죽비에 얻어맞은 자리의 얼얼함을 잊어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의 지평」은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고 적절히 명명한 것의 핵심에 자리한 소통 자본주의의 존재 양식을 파헤치면서, 우리 시대의 진보적 상상력이 처한 곤경에 대해서도 대단히 매력적인 설명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공산주의 개념을 가다듬으면서 조디 딘은 집합성, 적대, 욕망의 개념을 강조한다. 집합성과 적대를 강조하는 것은 자율성, 개인 등의 범주에 비해 집합 혹은 전체의 범주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자본주의 과정에서 나머지가 되어가는 우리 존재와 거부(巨富)들 사이의 계급적 짜임을 전면적으로 재배치할 것을 요구하는 맑스주의 이론가·활동가로서 당연한 일이다. 한편 욕망이라는 개념은 소통자본주의 및 여기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많은 좌파들(이들은 많은 경우, 우리라는 지평을 망실한 채 이슈 정치, 정체성 정치, 개별성과 자발성과 결부된 민주적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이론적, 실천적 불모 상태에 빠져든다)에 대한 대타적 관점 속에서 형성되었다.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주체가 주이상스를 배열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을 가리키는 욕망과 충동의 구분이 이 대목에서 결정적이다. 욕망에 있어서 향락은 본래적으로 상실한 대상을 향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불가능한 것을 향한 노력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하지만 충동에 있어서 향락은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상실 그 자체가 향락의 대상이기 때문에 아무 목적 없는 과정 자체가 주체에게 향락을 가져다준다. 유튜브를 켠 우리가 특정한 컨텐츠를 향해움직이는 게 아니라, 뭘 볼지를 몰라 거듭 헤매는 일에 중독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딘은 전통적인 메시지-응답의 구조에서 유지되어 오던 분할을 없애버리는 소통 자본주의 네트워크를 제대로 사유하지 않는 한, 공산주의적 재배치라는 집합적 욕망이 아니라 개별성, 자발성, 소위 민주적 과정에만 함몰된 채 집합적 계획과 의지, 규율 등을 어이없게 폐기시켜버리는 충동의 순환구조에 사로잡혀 엄지손가락이나 쪽쪽 빨고 있는 좌파 멜랑콜리의 처지를 넘어설 수 없으리라고 단정짓는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조디 딘의 입장에 있어서 공산주의 정당이 차지하는 자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주인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민 사이의 분열, 통치와 피통치의 불가능한 동일시 등의 아이디어를 종합적으로 고찰하면서 딘은 슬라보예 지젝의 논의를 빌어 공산주의 정당의 위치가 주체의 결여와 대타자의 결여가 겹치는 자리에 놓여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거칠게 풀어 말하자면 딘이 말하는 공산주의 정당이란 공산주의의 (불가능한) 필연성을 믿되, 이 모든 일들이 어디로 귀결될지는 모르는 조직으로서, 역사라고 불리는 개방된지평에 자기 존재를 걸어보는 이론적·실천적 모험이다.

 

조디 딘의 결연한 확신은 우리를 짜릿하게 만들기에도, 불편하게 만들기에도 충분하다. ‘적어도 이건 아니지 않냐는 소극적 자유민주주의적 개혁 이상의 목표를 위한 집단적 욕망의 경험을 거의 가져보지 못한 한국의 독자 입장에서 공산주의의 현실성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돌파해야 한다는 조디 딘의 희망에 찬 주장과 확신은 짜릿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가 소통 자본주의의 충동 회로를 공산주의의 집합적 욕망에 날카롭게 대비시킬 때, 이것은 너무나도 무모하기만 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더군다나 2012년에 출간된 이 책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 집합적으로 솟아오를 공산주의라는 대안을 너무나도 명약관화한 것처럼 치부하는 것에 비해, 그로부터 8년이 더 지난 우리들의 2020년이 여전히 자본주의의 태양 아래 있음을 알아차리는 독자라면 조디 딘의 확신에 찬 단언은 돈키호테적 무모함 이상으로 보이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그와 같은 인상을 부인하지는 않은 채로 조디 딘의 결연한 확신이, 그의 공산주의 정당 개념이 그러하듯, 우리에게 정답을 일러주려 의도된 것은 아님을 환기시키면서 글을 마치고 싶다. 오늘날 우리가 종교 경전을 예언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그 믿음의 가치를 식별하려 애쓰는 것처럼 조디 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감행해보고 있는 공산주의적 이론·실천들 역시 정세에 대한 예측의 정오(正午/正誤)를 넘어서 사유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의 태양이 저무는 시간이 도래할 때까지, 우리는 믿는 자로서의 도리를 다 하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