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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회의주의적 구체화와 ‘함께’ 해방을 믿기 본문
-염동규 (문학평론가)
회의주의적 구체화와 ‘함께’ 해방을 믿기
- 리처드 왓모어 저, 이우창 역, 『지성사란 무엇인가?』, 오월의 봄, 2020
전문적인 인문학 연구를 지향하는 연구자들이라면 반드시 탐독해야만 하는 이 책, 『지성사란 무엇인가?』는 책의 핵심적 내용인 ‘지성사 연구에 대한 방법론적 안내’라는 의미에 우선하여, ‘학술 운동 선언’으로 먼저 읽혀야 한다. 인문학 연구의 ‘전문성’이 아무에게나 의심받거나 참칭 당하고, 심지어는 인문학 연구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세계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은 채 인문학에 대한 막연한 낭만화나 힘 빠지는 자조에 그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특히 더 그러하다. 이 책의 역자이자, 빼어난 지성사 연구자로서 활약하고 있는 이우창이 SNS에서 언급한 것처럼, “200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것은 (…) 많은 분과들이 스스로의 토대를 구성하는 존재이유와, 그 존재이유에 따른 실천을 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이우창 페이스북: 2020.4.1.) 이러한 상황에서 지성사 연구의 궤적은, 인문학 연구자들이 ‘방법’의 확립을 통해 후일을 도모할 수 있게 돕는 훌륭한 참조점을 제시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장에서 ‘지성사 연구’가 무엇인지를 개략적으로 소개하고, 2장과 3장에서는 관념의 역사를 다루고자 하는 일군의 움직임들(관념사(러브조이), 개념사(코젤렉), 고고학/계보학(푸코), 정치철학사(스트라우스)) 가운데서, ‘언어맥락주의’를 방법의 기반으로 삼은 지성사 연구가 성립된 과정과 차별성, 강점 등을 소개한다. 4장과 5장에서는 언어맥락주의에 기반한 지성사 연구의 실제 ― 17세기 유럽의 정치사상사 연구자인 존 던, J.G.A. 포콕, 퀜틴 스키너 등의 연구가 여기에 해당된다 ― 에 관해 설명하고, 이 같은 흐름의 중심에 있었던 퀜틴 스키너의 작업이 지성사 연구의 실천적 가능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 보여준다. 6장은 저자가 ‘휘그 사관’이라 부르는 목적론적인 역사 기술에 대한 반대로서 지성사 연구를 소묘한다. 개인적으로 지성사 연구의 실제를 보여주는 4장이 17세기 정치사상사에 대한 연구 소개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지성사 연구가 왜 나타났고, 뭘 하자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지성사란 무엇인가?는 탁월한 안내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이 책 출간 이후의 후속 작업으로서, 한국의 지성사 연구자들이 지성사 연구 방법론을 공유하는 학계 안팎의 지형도와 탁월한 지성사 연구서들을 소개하는 작업을 이어갈 것이라고 하니 독자 여러분들에게도 주목을 권한다.
한편, 이 책이 강조하는 언어맥락주의적 방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역사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과거인들이 ‘문헌’을 통해 남겨놓은 ‘관념’에 주목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하에, 2)과거인들의 문헌에 나타나는 ‘발화’가 곧 주어진 언어적 맥락 속에서의 ‘행위’에 다름 아니라는 관점을 바탕으로, 3)발화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해당 발화 행위가 일어나는 특수한 언어적 맥락의 엄정한 재구성 속에서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관념의 산물을 경제적 운동에 비해 부차적이라거나 심지어 무시해도 좋다는 식으로 주장해온 일군의 맑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박과 함께 흔히 제기된 측면이 크다. 게다가 이 책에 소개된 몇몇 지성사가들은 맑스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해방에 대한 열망과 거대 서사에 대한 지향이 정치적으로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관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p. 171.). 지성사 연구가 종종 실천적 전망이 부재한 상대주의로 곡해되는 것도 이러한 지점 탓인데,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지성사가들의 관점이 상대주의보다는 회의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역설한다(p. 210.). 여기서 발견되는 대립을, ‘회의주의적 구체화’와, ‘해방에 대한 열망’(맑스주의 등) 사이의 대립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진정한 해방을 위해선 해방의 쉬운 꿈으로부터 우선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 관점에서도 역사의 과정에 대한 회의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는 지성사 연구자들의 입장에는 새겨들을 부분이 매우 많다고 생각된다. 포콕이 강조하듯, 지성사가의 관점에서 “역사는 흑도 백도 없는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행위에 대한 학문”이자, “필연이란 없”는 세계에서 나름의 타당성을 갖춘 인간들이 내리는 선택들에 대한 학문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행위자들이 어떤 식의 언어로, 어떤 식의 맥락 속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발화를 했는지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지 않은 채, 해방의 쉬운 꿈에 취해 역사의 과정을 성마르게 재단하는 데 급급하다면 필경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과거인들의 사유를 이해하는 작업으로부터 얻은 바를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실천을 구상할 때, 우리 자신의 실천 배후에 위치하는 ‘믿음’의 차원을 사고하는 일 역시 필요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들의 배치가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변화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과거 시대의 언어와 관념의 맥락에 관해 지성사 연구로부터 배우게 되는 통찰과 더불어, 독자 여러분들이 우리 시대의 ‘믿음’에 관해 생각해보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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