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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원우칼럼

명료함을 택할 용기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12. 10. 15:25

명료함을 택할 용기

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 석사 재학 한윤진

 

 한창 페이스북에 열심히 글을 써 올리고 이른바 키배를 일삼던 시절, 내 자기소개란을 차지하고 있었던 문장은 ‘Clarity makes people angry’였다. 나는 프로필 사진을 무지갯빛으로 씌우고 누구보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의견을 타임라인에 열띠게 써 올렸다. 그 덕에 가깝지 않던 지인들과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수많은 옳고 그름 혹은 아웃팅 비스름한(사실 아웃팅인) 메시지를 받았다. 그들은 내게 책임감 없이 뱉어내는 말의 오류와 모순을 따져 물었고 결국 잘 먹고 잘 살아라!”와 같은 의미인 차단한다 메갈련이란 인사를 건네받으며 대화를 마치기 일쑤였지만 당시에 느낀 건 불쾌감보다는 나의 명료함을 확인했다는 쾌감 정도였던 것 같다. 명료함은 사람들을 화나게 한다. 저 사람은 내 말에 화가 났다. 고로 나는 명료하다.

 내게 하나의 척수처럼 자리 잡은 명료함이라는 기준은 스스로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이는 단순히 명료함 자체에 대한 강박이라기보다는, 내가 미술을 전공했고, 그걸로 대학원이나 진학할 예정이었으며, 간지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 학교 안팎으로 포트폴리오를 들고 크리틱을 다니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큐레이팅 학사를 따냈다는 얄팍한 이유만으로 가끔은 비평문을 써 내리는 입장이었으므로 나에게도 남에게도 명료해야만 나는 나를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명료해야만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그 명료함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것을 세공할수록 동시대 미술의 늪으로 깊숙이 발을 담그게 되었다. 다신 빼지 못할 것 같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던 시점이었던 것 같다. 그 시기는 내가 학부를 졸업하고 뭔가 더 넓은 풀(pool)을 찾아 나서려고 장전하고 있는 동시에 코로나가 전국에 기승을 부릴 때였다. 덕분에 나는 학부 내내 바깥살이를 하다가 본가로 잠시 돌아감에 따라 부모님이 내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때보다 많이 던질 수 있는 최적의 상황에 놓이게 됐다. 대학원 진학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나와 달리 아빠 측에선 학비와 생활비라는 라임으로 내게 어퍼컷을 날렸다. 결과적으로 나는 엄마의 단호한 지지를 받으며 대학원 직행열차를 탈 수 있었지만 내 현 위치와 직업으로서의 진로에 관한 아빠의 명료함은 나를 화나게 했다.

 화가 나는 다양한 이유들 중에서 내게 해당된 것은 불안함이었다. 아빠가 이제 자신의 노후준비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가 이유 불문하고 내 공부를 지지하자고 한 것이 엄마의 대학생활을 반대했던 외할아버지가 떠올라서라고 고백했을 때, 자식으로서의 도리와 자신으로서 살려는 의지의 힘겨루기가 나를 미치게 불안하게 했다. 특히 금전적인 문제와 가장 맞닿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택한 이 파인아트의 길에서는 당장 돈을 긁어모으긴커녕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이 생태계가 다시금 보이는 것이다. 미숙한 전시를 올리는 일도, 유의미함의 완결성이 부족한 작업을 파는 일도 어쩌면 등한시되는 이 엘리티시즘의 바닥에서 나라는 평민이 그놈의 담론과 명료함에 집착해서 엄마 아빠한테 남는 보장된 유의미함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동 대학원 진학은 부모님과의 합의점이었다. 그 불가피한 선택에 대한 저항감은 이 느슨한 환경에서 뭘 더 배운단 말이냐는 거만함이었다가, “그래 대학원은 혼자 연구하러 가는 곳이야로 전환되었다. 이른바 먹고사니즘에 대한 불안과 호되게 인사하고 나니 사람은 쉽게 바뀌었다. 나는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그렇게나 질색하던 학과 조교를 하며 돈을 모았고 없는 돈으로 재테크에도 기웃거렸다. 무목적의 상태로 작업과 전시에 대한 무게를 쌓을 시간 보단 내 능력치를 검증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 닥치는 대로 하던 전시 관람과 미술서적 읽기는 차치해두고 포트폴리오를 들고 미술계의 인사들이 출강하는 프로그램에 찾아갔다. 내 작업은 흥미롭다 재미없다도 아닌 거의 무관심급 혹평을 받았다. 너무나 명료한 논리의 혹평은 나를 화나게 했다. 알아주는 비평가들에게 평가 좀 해달라고 불쑥 포트폴리오를 내밀었다. 그중 한 명은 내 포트폴리오를 탐내며 가져갔다. 그가 명료한 이유를 덧대며 보내는 찬사에 나는 속으로 화가 났다. 전시 지원 공모에 이력을 넣었다. 열심히 떨어지고 하나 붙었다. 당선자에 명료하게 적혀있는 내 이름에 화가 났다. 미술계에서 알아주는 교수님이 계신 타 전공 이론 수업을 청강했다. 내 작업 속 빈약한 논리를 명료하게 정리하는 교수님은 나를 화나게 했다. 개인전을 올렸다. 그놈의 담론적이지 않은 작업으로 전시를 올렸다는 이유로 작가를 꿈꾸며 정진해나가고 있는 지인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를 화나게 했다.

 그러니까 나로부터 시작된 그 자기모순과 부끄러움과 창피함의 화는 끝내 전부 나를 향했으므로 나는 화를 삼켜야만 했고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명료함을 내걸 수 없는 처지가 됐다고 느꼈다. 스스로에게 부재하는 명료함을 어떤 누구 앞에서 내걸 수 있단 말인가. 아 아닌가 이건 스스로에게 너무나 명료해서 느끼는 분노인 것인가. 아 명료함이란 너무 싫어. 팩트 폭력은 엄연한 폭력이야. 여전히 내 페이스북 자기소개란은 ‘Clarity makes people angry’가 자리하고 있다. 이른바 빻은말을 건네는 이들을 놀리고 싶었던 문장이 나에게로 돌아와 꽂힐 때, 나는 약간의 쓴웃음과 창피함을 머금고 생각한다. 역시 명료함은 사람을 화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