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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타킹과 세이토 그리고 나혜석과 같은 공주들 : ‘공’부하는 ‘주’부에 관한 단상 본문

7면/원우칼럼

블루스타킹과 세이토 그리고 나혜석과 같은 공주들 : ‘공’부하는 ‘주’부에 관한 단상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10. 22. 22:08

블루스타킹과 세이토 그리고 나혜석과 같은 공주들 

: ‘공’부하는 ‘주’부에 관한 단상 

 

박지나 

영상문화학과 박사 수료

 

아이가 태어나고 삼칠일이 지나자마자 대학원을 갔다. 서른이 넘어서, 육아를 하면서 하는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아이가 커가도 엄마의 손길은 늘 필요했고, 삼시세끼 노동은 줄어들지 않았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가슴에 탁 와 닿은 것은 다름 아닌 여주인공 손목의 아대였다. 보는 순간부터 흐르던 눈물은 영화 끝까지 멈추지를 않았다. 아대가 뭐라고어떤 말도 필요 없이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게 했다.

 

뭔가 좋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즈음, 동네에서 꽤 오래된 스터디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의 이유로 경력단절이 된 사람, 아이가 어려서 멀리 나갈 수 없어 집에서 육아와 과외를 하는 사람, 나처럼 아이를 키우며 대학원에서 자신의 공부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모였다. 방법은 대학원 스터디와 비슷했다. 좋은 책을 나누어 발제하고, 원서를 돌아가며 해석했다. 다른 점은 아이를 데리고 가기도 하고, 필요한 용품을 나누기도 하고, 음식을 싸 가지고 와서 스터디 후 작은 파티가 열린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함께하는 공부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에 아이들도 자랐고, 공부도 우정도 깊어졌다. 나는 이들을 공주라고 불렀다. ‘공부하는 주부들라고.

 

과거, 우리사회에서 주부의 성공은 남편이나 아이들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주부가 되는 순간,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엄마, 아내라는 이름으로 가려지고 그녀들의 꿈과 소망은 묻혀버렸다. 워킹맘의 경우에도 별반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주부의 노동은 사라지기는커녕 살림과 육아의 이중고에 다시 전업 주부의 길을 선택하게 했다. 학원가에는 자식의 성공적 입시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주부들도 볼 수 있다. 이들이 사교육에 열성인 것은 단순한 모성애 때문은 아니다. 어쩌면 자녀의 성공은 엄마의 자아성취의 수단이자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이기 때문이리라. 이는 주부가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꿈조차 직접 꿀 수 없는 사회적 소외계층임을 반증한다. 근래 인문학 바람이 불면서 공주는 더 늘어났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청춘들도 취업이 안 되는 요즘, 그녀들은 왜 학생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일까? 주부들이 공부하는 이면에는 소외된 삶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것도 있겠지만, 결혼, 임신, 출산, 육아, 시댁과 친정이 얽힌 이런저런 경험이 이미 인간의 성찰을 기본으로 하는 인문학으로 낯설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때문일까? 예전에 난해했던 책들이 이제야 쉽게 읽혀진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들

 

사실 공부하는 여자, 책 읽는 여자들이 비난받고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날카로운 풍자와 따뜻한 인간애가 담긴 그림의 19세기 프랑스 화가 도미에(Honoré Daumier)조차도 자신의 본분을 잃고 공부하는 주부를 비판했다. 그의 판화 블루스타킹에는 어머니가 창조의 열풍에 빠져 있을 때 아기는 욕조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라고 쓰여져 있다. 원래 블루스타킹18세기 영국 일주일에 한 번씩 문학 취향이 비슷한 여성들이 사교와 교육을 위해 결성된 비공식 여성단체로 여성들끼리의 진정한 우정을 강조했지만, 당시 블루스타킹은 당시 유식한 여성들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조롱과 비난의 상징이 되었다. 근대 일본의 여성문예잡지 세이토는 한자 그대로 청탑(青鞜), 블루 스타킹이다. 세이토의 여성들은 스스로를 신여성으로 규정하고 이전 시대의 남성 중심적 관습과 비판하고 여성의 자아확립을 주장했다. 이 잡지는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한국의 근대여성문학가인 김명순, 김일엽, 나혜석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신여자를 창간하고 청탑회를 조직하게 했다. ‘이혼고백서로 유명한 화가 나혜석 역시 1913년부터 1918년까지의 일본유학 생활을 통해 가장 영향을 준 잡지가 세이토였다. 그녀가 그린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이라는 제목의 네 컷의 만화에서 신여성은 낮에는 집안일을 하고 밤이 되면 늦게까지 책을 읽고, 다시 새벽까지 원고를 쓰고 집안일을 하면서도 신여성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 시절 그녀들도 바로 공주, 공부하는 주부였다.

 

그런데 주부들이 왜 계속 공부를 하는 것일까? 사실 공부는 운동처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자신을 단련시키기 좋은 과정이다.
특별한 목적을 두지 않더라도 공부를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잡념을 떨쳐내고 몰입해야하는 과정이다. 고도의 정신력이 필요하고, 매일 매일 꾸준히 해야 하는 성실이 요구된다. 공부할수록 세상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터무니없이 적은 것임을 알면 겸손해지고, 공부 중에 작은 깨달음은 살아가는데 용기와 지혜를 준다. 입시생이나 취준생들만 치열하게 공부하는 것도, 대학원이나 연구소에서만 하는 것도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날사람들도 치열하게 공부했고 오늘날의 주부들도 치열하게 공부한다. 함께하는 공부는 심지어 즐겁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속도대로 사는 삶, 일상을 즐기면서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어쩌면 공부한다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 목적을 세우고 뜻을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나와 내 삶, 그 자체를 사랑하고 나의 존재와 나의 목소리를 찾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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