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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길과 걸음 본문
-홍익대학교 미학과 석사 재학
박서희
대학원 입학처에서는 입시 철마다 아르바이트생을 뽑는다. 단 일주일 안에 천여 개가 넘는 입학 원서가 한 번에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세 명을 뽑았는데, 그 안에 포함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기약 없이 열지 않는 학교 시설의 근무일을 기다리는 와중이라 운이 좋았다. 아직 잠겨 있는 문 너머로 전화벨 소리가 들리는 입학처 사무실에 드립 커피 내음이 풍기는가 싶더니, 곧 저마다의 꿈과 자격을 품은 서류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대학원별로 필요한 서류가 다르고, 첨부할 수 있는 자료들과 포트폴리오의 규격이 다르기 때문에 아르바이트생의 업무는 주로 모든 입시 원서가 올바르게 갖추어졌는지 확인하고, 각 대학원과 분과별로 분류하는 일이다. 입학처 사무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우는 책꽂이에 입시 원서들을 꽂아 넣으며 자연스레 내가 원서를 쓰고 지원할 당시가 떠올랐다. 서류로 증명되지 않는 일을 했기에 증빙할 것도 없었고, 수학계획서 두 장 외에는 보여줄 것도 없었기 때문에 원서를 포함한 다섯 장의 종이를 부치고 그저 기다렸던 것 같다. 주소를 잘못 쓴 것 같아서, 이메일을 잘못 기재해서, 성적 증명서가 원본이 아닌 것 같아서, 심지어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경쟁률이나 지원자 수가 궁금해서 거는 전화를 받으면서는 그때의 마음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나는 왜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었나. 모종의 일들로 사회에서는 증빙 가능한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고, 권위적인 지대를 비판하고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곳에 직접 들어가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년의 반-자발적 갭 이어(gap year)를 가지며 우연하게도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었고, 막연하게나마 이미 분류된 예술 사조를 공부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고민했고, 미학과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프라그마티즘(pragmatism) 미학이 철학의 실천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줄 것만 같아 미술사학과가 아닌 미학과에 가기로 했다. 우연의 중첩은 어떤 필연적인 느낌을 발생시켰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인 선택으로 원서를 넣었다. 그만큼 포부도 넘쳤었다. 막상 들어와 보니 니체는 평준화되어가는 고등 교육을 비판하고 있었고, 프라그마티즘 전공 교수님은 이미 학교를 떠난 후였다. 영감과는 멀어지고 무사 졸업이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서울의 월세와 생활비로 빚을 늘리고, 책을 읽는 시간보다 일을 하는 시간이 더 길어 질 때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나와 같은 선택을 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 것이다.
어떤 답을 찾기 위해 왔다. 내가 원하는 답이 여기에는 있을 것이라 스스로 정해두었다. 답을 정해두고 가는 길은 안정되고 변함이 없다. 과연 그런가? 정해둔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불안해지고, 다른 답이 나오지 못하도록 더 애를 쓰고, 그러다보면 정답에 완벽하게 이르는 길을 제외한 다른 모든 길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만다. 그 다른 길들을 다시 막고 쳐내는 데 힘을 들이는 동안 눈앞에 명확하게 솟아있는 —것 같았던— 정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수만 갈래의 길이 펼쳐진 미로 한 가운데 서있는 것 같은 기분(Befindlichkeit)을 만나게 된다. 선택할 수 있는 것들에 둘러싸여 정작 선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럴 때면 인생이란 삶의 의미와 답을 찾아내어야만 하는 위험천만하고 고단한 여정이라 한탄하는 함정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세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미로에 겁을 먹지만 않는다면, 잠시 멈추어 끝이 보이지 않게 뻗어있는 수만 갈래 길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첩첩산중과도 같은 미로의 이미지에서 미약하게나마 창조의 빛 한 올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길들을 만들어낸 힘으로 하나의 길을 더 내고, 영 아닌 것 같은 길을 막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실낱같은 창조를 한 손에 꼭 붙들고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볼 수 있다. 미로를 미로로 만들지 말고, 다리로, 출구로, 입구로 만드는 것이다. 테세우스의 용기와 아리아드네의 지혜처럼 단념하는 힘과 선택하는 유희를 양 손에 들고 어두운 길을 걸어갈 때에 미로는 한 길이 된다.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행위를,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걸음을 만드는 것이다. 창조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책꽂이 칸칸을 다시 북엔드들로 나눈 작은 공간에 서류더미들이 가득 찼다. 규정 상 제출할 수 없는 실적물과 증빙 자료들을 폐기하며 생각한다. 몇 장의 종이들에 한 사람의 꿈과 자격이 담길 수는 없다고. 각자가 가진 분류될 수 없는 힘과 평가될 수 없는 생기(生氣)를 떠올린다. 대학원은 하나의 길이지 걸음이 아니다. 이 길 위의 걸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수많은 길 위의 걸음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내 걸음의 끝도 이 길을 만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디로 어떻게 내딛을까의 고민을 땅을 밟는 의지로 바꾸면서 만원 버스를 탄다. 커피를 내리고 원격으로 진행되는 비대면 면접에 대한 문의 전화를 받는다. 입시철만 되면 분주한 이곳에도 걸음과 삶이, 끝없이 파괴되는 미로와 창조의 이미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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