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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사유와 존재의 일치라는 꿈: ‘계급의식’ 개념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 본문
- 죄르지 루카치 저, 박정호·조만영 역, 『역사와 계급의식』, 거름, 2005. 제3장~제4장
염동규(문학평론가)
지난 호에서 지적한 대로 루카치의 ‘계급의식’ 개념은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의 ‘통일’이지만, 이 점은 자주 놓쳐진다.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짐짓 비판적 어조를 취하면서도, ‘현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급의식 개념, 나아가서는 맑스주의자들의 주장 자체를 철 지난 것으로 기각하는 자들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위장된 순응의 문제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들이 자랑하는 그 정도의 ‘발견’만으로 맑스주의가 기각될 수 있을까? 계급의식 개념을 ‘심리학적 사실’로 환원하지 말 것을 분명히 강조하는 루카치에 따른다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심리학적 사실로 환원할 수 없는 계급의식’이란 대체 무엇인가? 가장 간단한 대답은 두 개의 문장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1)“생산과정에서의 특정한 유형적 상황에 귀속되는, 합리적으로 적합한 반응이 바로 계급의식이다.” 2)“계급의식이란 (…) 계급의 역사적 상황의 뜻이 의식화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렇게만 본다면 계급의식은 ‘심리학적 사실로서의 의식’과 다를 게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문장이 어떻게 도출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한데, 이를 위해선 4장이 도움이 된다.
4장은 총 세 절로 구성되어 있다. 1절에 해당하는 「사물화 현상」은 상품형식이 사회의 보편적 형식으로 자리 잡는 역사적 과정 및 ‘사물화’의 성립에 관해 설명한다. 2절은 부르주아 사유가 주객 이원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이유를 통렬하게 비판한 뒤, 헤겔에 이르러서야 완성된 ‘변증법적 사고’를 고평한다. 헤겔 이후에야 사유와 존재,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 ‘역사’를 근거 삼아 확보될 수 있었고, 진리가 실체로서, 또한 주체로서 파악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자신이 정당하게 주장한 ‘역사’에 대해 일관적이지 못한 생각을 보여주면서 다시금 주객 이원성으로 회귀하고 말았는데, 이때 등장하는 것이 역사의 “주객동일자, 행사(行事)의 주체, 발생의 ‘우리’를 자기 삶의 근거로부터, 자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계급,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이다.
3절은 바로 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바쳐진다. 루카치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있어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순한 객체로서만 우선 드러난다(=역사과정의 단순한 ‘대상’). 프롤레타리아트는 전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없을 듯 보인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처지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와 소외라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현실을 ‘아무러한 환상도 없이 의식’할 수 있다. 자본주의 과정에서 배가 부른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이 과정의 주인공이라는 ‘환상’을 벗어던지지 못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 과정을 “무한정한 노예화를 뜻하는 적나라한 참혹한 형식”으로 ‘직접’ 체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체적 과정 속에서 완전한 ‘대상’으로,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존재조건(=자본주의 사회 속 대상들의 존재조건)을 인식·지양하는 실천에 나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루카치가 말하는 ‘대자적인’ 프롤레타리아트(‘대상의 의식’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성립이자, 앞서 말한 “생산과정에서의 특정한 유형적 상황에 귀속되는, 합리적으로 적합한 반응”으로서의 ‘계급의식’이 확보되는 과정이다. “주어진 상황의 단순한 직접성이 극복되는 순간”, 즉 “계급투쟁”의 시간은 이렇게 찾아온다. 이처럼, 루카치가 말하는 ‘계급의식’ 개념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 과정에 따른 프롤레타리아트의 ‘객체화’를 통해서, 바로 그 ‘속에서’ 자본주의를 내재적으로 초월할 수 있는 계기로서 성립된다.
물론 경험적으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은 역사의 총체적 과정과 나란하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루카치는 이를 도외시하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불일치를 정당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자본주의 ‘과정’의 ‘총체’와 결부시켜야 하고, 그랬을 때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의 형성, 그들의 이론=실천, 다시 말해 역사의 변혁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리라는 게 루카치의 생각이었다. 계급이 갖고 있는 ‘의식’이 자본주의의 총체적 과정과 결부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다면, 계급의식은 어디까지나 ‘허위’의식으로 남는다고 루카치는 분명히 지적했다. 따라서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심리적 사실’만으로는 ‘계급의식’ 개념을 성립시킬 수도, 맑스주의적 관점의 부당함을 논증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계급의식’과 ‘자본주의의 과정’을 이원적으로 분리한 채 ‘현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갖는 심리적 사실’만을 가지고 맑스주의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는 발상이야말로 사물화 과정의 효과라고 생각했다. 물론 남는 문제가 있다. 보다시피 루카치는 ‘경제적 내용 그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아무런 이데올로기적 형식’ 없이 직접 인식될 수 있다고 전제해버렸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루카치의 한계이지만, 역사의 과정과 우리 자신을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사유와 존재의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는 루카치의 ‘믿음’만큼은 변혁의 상상을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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