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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혁명적 정세에서 객관세계의 필연과 ‘비약’을 동시에 사고하기 본문
혁명적 정세에서 객관세계의 필연과 ‘비약’을 동시에 사고하기
- 죄르지 루카치 저, 박정호·조만영 역, 『역사와 계급의식』, 거름, 2005. 제5장~제6장
염동규 문학평론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이 책의 4장에서 루카치는,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진 시대에는 ‘경제적 내용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형식’ 없이 직접 인식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똑같은 주장이 5장에서도 반복된다. 지금의 시선에서 이는 루카치의 한계로 보이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 전에 물어봐야 한다. 대체 왜 우리에게는 자명해 보이는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이 루카치에게는 보이지 않았는가? 이를 위해선 그가 말한 ‘대자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을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루카치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1) 자본주의적 과정을 자신의 주체적 활동으로 볼 수 없는, 나아가서는 스스로가 ‘대상’일 뿐인 것으로 나타나는 계급적 위치에 놓여, 이 과정을 적나라하게 경험할 수 있다. 2)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은 ‘주체와 객체의 분열’을 의식하고 자신의 현실에 관해 ‘왜’를 물음으로써 현실을 ‘직접성’으로서가 아닌 ‘매개’ 범주로서 사유할 수 있다. 3) ‘대상’으로 전락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대상으로 만드는 현실을 사유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이것을 ‘대상의 자기의식’이라고도 부를 수 있고, 역사의 주체-객체라고도 부를 수 있다. 4)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의 구조에서 상품=대상으로 전락한 자기 자신을 의식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총체적 구조 자체를 알 수 있다는 점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위치가 갖는 우위다.
이러한 루카치의 논변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의 획득 과정을 ‘의식화 교육’ 같은 외부적 주입에 의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 ‘내부’의 변증법적 필연에 의해 산출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의 중간 개입을 사고할 여지가 적기도 하다) 중요한 건 이 과정의 초창기, 즉 자본주의의 모순이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시기에는 계급의식이 기본적으로 ‘허위의식’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말았다는 ‘한계’란 특정한 정세의 효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5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는 경제가 사회의 지배적 형태였고, 인간의 의지와는 아랑곳없이 사회를 움직여 가는 발전의 현실적 동력이었다. 그래서 이때에는 경제가 인간의 머릿속에서는 (…), ‘이데올로기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내용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 없이 인식되는 것은 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행기’에 한해서다. 『역사와 계급의식』이 이와 같은 정세 속에서 쓰였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루카치의 이론적 한계로 보였던 지점들이 생각 가능한 사유의 경로로 보일 수 있거니와, 5장과 6장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폭력’, ‘비약’ 및 ‘합법성/비합법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 범주들을 영원한 자연법칙처럼 간주하여, 그 극복 역시 자동으로 이루어지리라 착각하는 기회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루카치는 맑스를 인용한다: “모든 생산도구 가운데 최대의 생산력은 혁명적 계급 자체이다.”(이때 ‘생산력’에는 기술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이질(多樣異質)한 생산체계들이 투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특정 체계가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된다) 루카치의 눈에, 당대의 정세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 소외, 대상화의 과정이 ‘최종적 단계’에까지 이르러서 “혁명적 계급”인 대자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미 형성된 상황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비약’ 혹은 주체의 ‘폭력’이다. 자본 관계란 단지 경제적 관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본 관계 자체를 재생산하는 사회적 관계까지 아우르는 것인데, 이는 자연스러운 경제적 과정만으로는 유지할 수도(공황), 극복할 수도 없다(혁명). 따라서 자본 관계의 연쇄 회로는 ‘폭력’ 혹은 ‘비약’의 실천을 통해서만 끊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주는 과격한 인상과 달리 루카치는 ‘비약’이 “변혁을 이행기도 없이 번개같이 해치우는 단 한 번의 행위는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5~6장에 걸쳐 비약과 객관세계의 필연이 갖는 관계를 설명한다. 이에 관해 인상적인 대목은 6장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의 아르키메데스 점’에 대한 논의인데, 이에 따르면 맑스주의는 비판의 아르키메데스 점을 제공하는 이론이 아니라 주체-객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요청하는 “사회과정의 방향, 경향, 뜻을 명백히 인식, 표현”하는 것이다. ‘비약’ 역시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지난한 변혁을 가리키거니와, 바로 이 속에서, 그것과 함께, 인간을 구속해온 필연의 세계를 인간 존재의 본질 속에 용해하여 주체적으로 전유할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루카치를 윤리적 주체의 ‘비약’이라는 형상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어렵지만(Slavoj Žižek), 반대로 변증법의 논리적 필연에 경도되어 ‘정치’의 영역을 놓친 것으로(Aaron Jaffe) 해석하는 것도 곤란한데, 이처럼 필연성과 비약의 분리불가능성을 사고하는 루카치의 매력적인 논변들은 둘 중 전자만을 강조함으로써 갱신되지 못하는 낡은 맑스주의나, 후자만을 강조함으로써(급진 민주주의론이 이 범주에 묶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론을 삭제하고 정치(정체성 정치이든 대중 정치이든)로만 경도되는 흐름 모두에 대해 유효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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