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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개인들이 아니라 역사를 대표하는 ‘당’: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위기와 당의 지도 본문
죄르지 루카치 저, 박정호·조만영 역, 『역사와 계급의식』, 거름, 2005. 제7장~제8장
-염동규(문학평론가)
자본주의의 위기가 가시화된 시점에는 경제적 내용이 이데올로기적 형식의 허울 없이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앞선 장들의 주장은, 그 배후에 놓인 변증법적, 정세적 근거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낙관적으로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위대한 사상가들의 글이 대개 그렇듯이 이게 전부는 아니다. 경제적 내용이 직접 인식되는 계급의식의 시간에 대한 강조와 동시에, 루카치는 계급의식의 불균형 발전에 대해서도 인상적인 주장을 펼쳤고, 이 대목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위기”라는 또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으니까 말이다. 7~8장을 아우르는 중심 문제는 ‘전위 정당’의 문제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전 견해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로자는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신뢰에 기반하여 사회주의 정책의 후퇴 없는 관철을 요구하면서 볼셰비키의 토지 정책, 대외 정책 등을 비판한 바 있다. 루카치에 따르면 이와 같은 로자의 견해는 후일 철회됐지만,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기회주의자들은 로자 자신조차도 내버린 주장을 출판하고 있었다. 루카치가 7장에서 굳이 로자를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튼 로자에 대한 루카치의 반박은, 그것이 역사적 상황에 대한 잘못된 평가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혁명과 볼셰비키의 역량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고, 기회주의자들의 준동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 대중의 자발성을 긍정하면서 볼셰비키 독재를 맹비난한 것이 그러한 잘못된 평가들의 발로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정치의 어떤 절대적 지평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시선에 입각했을 때, 대중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볼셰비키 독재를 정당화하는 그의 주장은 거의 터무니 없이 느껴진다. 하지만 루카치의 ‘정치학’을 섣불리 기각하기보다는 대체 루카치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주장하는지 알아볼 필요도 있다. 우선 로자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말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민주주의를 하자는 말이지 민주주의 없이 ‘특정한 분파’가 다 해먹자는 말이 아니다. 애당초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 자체가 다수-됨이므로, 예컨대, 인구의 99%가 프롤레타리아트인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민주주의와 전혀 다른 것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루카치 역시 여기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로자는 “혁명적인 노동운동이 범하는 오류가 최선의 ‘중앙위원회’의 무오류성보다 역사적으로 보아 훨씬 더 성과가 많고 가치 있는 것”이라며 대중의 자발성을 긍정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마치 어떠한 지도도 없이 자연히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루카치가 보기에 이것은 부르주아지들이 반혁명을 일으킬 시간을 벌어주고, 혁명을 부정하는 기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세력을 얻는 것도 막지 못하는 대책 없는 주장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혁명은 의회 민주주의적 핑퐁 게임으로 뒤바뀌어 버린 채,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가버리고 말리라는 게 루카치의 우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심화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의식을 갖게 되면 이데올로기적 형식 없이도 경제적 내용을 직접 인식할 수 있다고 했으면서 왜 대중을 못 믿고 부르주아지나 기회주의자를 그리도 걱정하냐고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루카치는 계급의식의 불균형 발전론을 주장한다. 역사의 기본적인 방향은 대자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과 그 승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역사발전에 대한 이러한 낙관을 강조하는 맥락에서는, 혁명기에는 이데올로기 없는 경제적 내용의 직접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시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계급의식이 “객관적인 경제적 위기와 평행해서, 직선적으로 그리고 전프롤레타리아트에 걸쳐 똑같은 방식으로 발전하지는 않”으므로 이것을 가리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의 불균형 발전,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위기”라 한다. 그러니 프롤레타리아트가 많든 적든 침윤되어있는 이데올로기적 오류를 역사적 발전의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지도적 그룹이 있어야 한다. 볼셰비키 독재에 대한 지지와, 8장의 ‘당’ 개념은 이렇게 도출된다.
루카치의 ‘당’은 불균형하게 성숙해 가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의 선진 분자들(이들 역시 자본주의 세상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기에 개개인으로서는 특권적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이 모여 만들어낸 역사적 운동의 최전선 지휘부이지 프롤레타리아트 개개인들을 대의(代議)하는 기관이 아니다. 당은 역사를, 역사의 필연적인 진보를 향해 가는 올바른 의지를 대표할 뿐 기본적으로 개인들을 대표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생각, 아직 이데올로기를 충분히 벗어나지 못해 순수하지 못한 현재의 생각은 원리적으로 부차화된다. 그런 점에서 루카치는 ‘공산당’이 부르주아 정당보다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당’에 대한 루카치의 이러한 견해는 관념 속에서나 성립하는 견해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방향을 집합 의지적으로 지휘할 수 있다는 상상력 자체는 여전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인간사에 저절로 이뤄지는 일은 없고, 이대로 ‘민주주의’ 타령만 하다가는 다 죽게 생겼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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