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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정치경제학개론 과제물의 마감일입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10. 17. 16:57

오늘이 정치경제학개론 과제물의 마감일입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도서출판 아고라, 2017.

 

염동규

 

 

 레닌의 제국주의 정의는 이렇다: “제국주의란 독점과 금융자본의 지배가 형성되고, 자본수출이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며, 국제 트러스트들에 의한 세계 분할이 시작되고, 가장 큰 자본주의 나라들에 의해 지구의 모든 영토 분할이 완료된 발전 단계에 도달한 자본주의다.” 이처럼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귀결로서 정의되기 때문에, 우리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결국 제국주의 전쟁과 식민지 분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레닌의 관점이다. 하지만 암울한 전망이 전부는 아니다. 자본주의가 최고 단계에 이른 제국주의에서야말로 진정한 생산의 사회화로 이행하게 될 단초가 제공되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자라나는 생산의 사회화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적 경제나 사적 소유의 관계들을 제거하여 대중에 대한 착취, 식민지에 대한 착취에 기생하는 자본주의 질서를 타파해야 한다.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 5장까지는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시기로부터 독점 자본주의의 시기가 되면서 자본주의의 세계 정복이 이루어졌다는 사태를 부르주아 학자들의 통계와 논의를 기반 삼아 설명하고, 6~7장에서는 자본의 세계 분할에 발맞추어 일어나는 제국의 세계 분할이 설명된다. 전세계에 이제 자본이 지배하지 않은 땅이 없고, ()식민지가 되지 않은 땅이 없으니 남은 것은 열강들 사이의 재분할을 위한 투쟁일 뿐이라는 것이다. 8장은 자본수출 가속화에 따라 어떤 일도 하지 않은 채 불로소득을 누리는 고리대 국가로의 경향과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 상층을 매수하여 기회주의자들을 만들어내는 수준으로까지 진전되었음이 이야기된다. 그런 점에서 9장은 기회주의자들과의 투쟁이 제국주의와의 투쟁과 동궤에 있는 것임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채워지는데, 특히 한때의 명망 깊은 사회주의자 칼 카우츠키가 이 맥락에서 대단한 공격을 받는다. 레닌에 의하면 카우츠키는 제국주의가, 독점화하는 자본주의의 운동과 무관한 것처럼 해석하면서 이른바 초제국주의라고 하는 자본주의와 평화적 민주주의가 공존하는 정치 모델을 상정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비판 이후, 레닌은 10장에서 <자본주의제국주의>라는 변증법적 연쇄를 요약하는 한편,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생산의 사회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수십 년 전의 사회운동가들에게는 달랐겠지만, 오늘날 레닌의 책은 더 이상 당면 운동의 구체적인 행동 지침처럼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 같다. 카우츠키 등이 주장한 자본주의와 평화의 공존 가능성에 대해, 레닌은 말도 안 된다고, 그런 공존이 가능해 보인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효과일 뿐이라고 손쉽게 기각해버리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마치 초역사적인 자연환경인 것처럼 취급되는 쪽에 가깝고, 열강에 의한 일방적인 세계 ()분할과 투쟁의 극대화보다는 다자간의 협상을 통한 갈등의 지속적 완화가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에서라면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 투쟁이야말로 돈키호테의 비현실적인 망상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언어가 그것을 완전히 퇴마해버리려는 수백 년 동안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어쩌면 예언적인) 최소한의/최대한의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공황과 파국과 전쟁을 방지하는 통치의 기술들이 한계에 도달하는 지점을 예시하는 전세계적 징후들의 계속되는 출현 때문일 것이다. 이 징후들이 더 이상 징후들로서만 존재하기를 그치고 자본주의의 막다른 길로 드러나게 될 때, 아마 우리는 그때부터 레닌 저작의 현실성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임박한 미래의 혁명을 예감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준비(그러나 가장 좋은 준비는 어떤 의미에서든 실천임을 인지한 채로)를 해나가는 것이 좋겠는데, 아마도 그 준비는 우리의 삶에서 정치경제학을 복권하는 일이 될 것 같다. 레닌의 시대에는 차르 체제의 검열이라는 조건 탓에 정치 투쟁의 언어를 선택하지 못하고 사실과 이론 중심의 언어를 선택해야 했지만(레닌은 어쩔 수 없었던 자신의 선택에 대해 신경질을 부린다), 정치 운동에 대한 직접적 기술을 포기하면서도 레닌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충분히(오히려 직접적으로 러시아의 현실에 착목하지 않는 환유적 언어가 레닌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가능케 했다는 생각도 든다) 암시할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의 시대에는 검열과 같은 강제적 입막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자연스러운 사실처럼 취급된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의 쓸모란 가격의 결정에 있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발설을 가로막는 데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겪는 문제의 핵심에 자본주의가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모순들이 첨예해지고 있는 오늘 밤, 정치경제학개론의 과제물 마감 기한이 머지않았음을 이제는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누구보다도 필자 스스로에게 다그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