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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좌표 잃은 좌파에게 찾아오는 도덕주의의 올가미 본문
좌표 잃은 좌파에게 찾아오는 도덕주의의 올가미
- 김정한, 비혁명의 시대, 빨간소금, 2021.
염동규
이 책은 1부에서 1990년대 이후의 한국 정치를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서술하고, 2부에서는 포스트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한국 맑스주의를 갱신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을 모색한다. 둘 가운데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진가는 2부에 있다. 2부에서는, 1부의 문제의식이 얼마간 이어지면서 포스트 맑스주의와 좌파 포퓰리즘을 중심으로 한 이론적 논의가 이루어진다. 한때의 지적 동지였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샹탈 무페와 슬라보예 지젝이 어떤 과정을 겪으면서 결별하게 되었는지, 지젝이 바라보는 급진 민주주의 기획의 문제는 무엇인지, 지젝의 정신분석학-정치철학적 입장은 어떻게 변모해 갔는지를 명료하게 설명하면서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 한국의 사회운동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함의를 설명하는 대목들은 현대의 좌파 정치 이론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에게 좋은 참조가 될 만하다. 특히 라클라우와 무페 식의 이론적 접근이 현대 정치철학으로서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지반이라고만 생각했던 한때의 나로서는, 이 책을 통해 계급 적대를 라클라우와 무페처럼 상징계가 아닌 실재계에 자리하게 하는 지젝의 논의를 접함으로써 급진 민주주의 기획의 한계를 설명할 수 있는 괜찮은 근거 가운데 하나를 발견한 듯해 기뻤다.
그렇지만 이 책의 1부에서 느낀 아쉬움 또한 숨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김정한의 시대 구분에 의하면 80년대 사회운동은 1980년 5.18에서 시작하여 1991년 5월 투쟁까지를 한 사이클로 하여 마감됐다. 1989년의 공안 통치, 1990년의 삼당 합당을 비롯한 지배 세력의 롤백을 다시 역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었던 1991년 5월 투쟁은 결국 패배로 귀결되었다. 이후에는 ‘민주주의’의 문제가 국가 담론으로 흡수되고 사회운동이 주변화되는 흐름이 한편에 있었고, ‘전향’이나 ‘포스트 맑스주의’의 문제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반지성적 낙인찍기가 다른 한 편에 있었다. 이렇게 종결된 80년대 사회운동의 흐름은 91년 이후 해체되어 가다가 97년 외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김정한은 지적한다. 대략 이러한 구도 속에서 김정한은 변화된 사회 구조에서 좌파에게 필요한 여러 과제를 꼽는다. 1)‘당 좌파’와 ‘사회적 좌파’의 연대, 2)도덕 기반의 논리에 대한 반대, 3)내부를 향한 반성, 4)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통일적 이해 등등. 이러한 김정한의 논지는 곱씹어 존중하기 충분한 것이지만, 독자로서는 이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들이 과연 무엇인지, 그것들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서술을 기대하게 마련인데 아쉽게도 비혁명의 시대는 단지 과제들이 산적해 있음을 선언하는 데 그친 감이 있다. 예컨대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통일적 이해가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김정한이 비판하는 최장집조차) 동의할 만한 일이지만, 정작 저자 본인도 ‘정당운동과 사회운동 둘 다 중요하다’는 상식론 이상으로는 나아갈 수 없어 보이고, 도덕 기반의 논리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의 글 곳곳에 도덕 기반 논리의 흔적이 발견되곤 한다.
여기서 나는 특히 도덕 기반의 논리와 관련한 생각을 조금 더 풀어놓고 싶다. 2장에서 김정한은 민주화 운동 세대의 이데올로기를 민중주의로 규정하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도덕주의를 비판한다. 이것은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를 도덕적인 잣대로 접근해서 ‘우리’와 ‘적’을 구별하고, 대중들의 도덕적 분노를 동원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김정한 자신이 한국 맑스주의의 위기를 돌파할 방법을 묻는 6장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이후의 ‘정치적 주체’ 문제와 관련해 도덕적 담론으로의 비약을 보인다: “새로운 주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변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충실성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 불안정 노동자들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되기 어렵다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던 그는 단원고의 한 학생이 프란체스코 교황에게 보낸 ‘어른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인용하면서, 이토록 신뢰할 수 없는 나쁜 세상을 만든 어른들은 낡은 정치적 주체인 반면, 청소년들은 “주어진 세계 자체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변화를 열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이와 같은 서술이야말로 구조의 문제로 접근해야 할 문제를 선과 악의 대립으로 전환하는 도덕 기반 담론의 한 전형으로서, 우리 시대의 운동을 위한 정치적 주체를 발견하는 데 기여하기보다 ‘우리 대 그들’이라는 정치적 대립을 이렇다 할 객관적 근거 없이 세움으로써 공연한 오해만 초래하게 되지 않을까?
나에게는 이러한 김정한의 횡보(橫步)가 정치경제학과 이데올로기 비판의 통합 실패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본지 3월호 저자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그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정치경제학만이 아니라 포스트 맑스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차원의 고민이 합쳐”지는 것을 바라는 연구자다. 그러나 이 저작은 정치경제학적 분석의 흔적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고,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학적 변화를 새로운 주체 생산의 이론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른바 맑스주의의 위기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동 운명에 기반한 정치적 주체를 다시 사고하고 조직하는 일은 좌표를 잃은 좌파들 누구에게나 다 어려운 일이지 싶다. 도덕주의의 유혹은 이럴 때 찾아오지만, 나는 부디 우리가 이 유혹에 너무 많이 지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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