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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어사일럼, 블랙박스, 트랜스적 망명 본문

8면/연극비평

어사일럼, 블랙박스, 트랜스적 망명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4. 5. 13:25

-전시 <You come in I come out Letters from Asylum>

-연극 <물고기로 죽기>

 

김민조(연극비평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초대의 인삿말조차 꺼내기 조심스러웠던 2020년 가을, 제주도의 한 커피숍에서 <You come in I come out Letters from Asylum>이라는 전시가 조용히 열렸다. 12년 전 군복무를 하던 도중에 동성애자임을 밝혔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던 제람을 포함하여 네 명의 동성애자 군인이 오랫동안 꺼낼 수 없었던 말과 기억을 기록한 전시였다. 전시 공간에는 그들이 편지처럼 빼곡이 글자를 적어내려간 병풍 형태의 설치물이 여러 개의 조를 이루며 세워져 있다. 서로 연결된 병풍들은 마치 기록자의 경험을 보호하는 것처럼 안쪽을 향해 오므려져 있기 때문에, 기록을 열람하고자 하는 관람객은 열려 있는 틈 사이로 진입해 병풍들이 이루는 반폐쇄형 공간 속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제람은 그 스팟을 어사일럼(Asylum)이라고 명명한다.

 

  영단어 어사일럼은 구금망명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거느린다. 제람을 낙인찍었던 군부대와 그가 강제로 수용되었던 정신병원, 나아가 호모포비아적 사회 전체가 구금의 의미에 상응할 것이다.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구금이란 비단 물리적으로 격리되는 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전시에서 병풍의 바깥면은 거울로 처리되어 있다. 따라서 어사일럼 밖에서 병풍을 응시하는 관람객들은 좌우가 뒤집힌 텍스트의 평면 속에 스스로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성소수자를 이해불가능한 외물(外物)로서 배치하는 편견의 감옥 내지는 사회라는 이름의 거대한 구금 시설에 대한 시각적 은유가 될 것이다. 반대로 제람이 12년 전 군에서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런던과 제주, 그리고 이 전시 공간 자체는 망명의 의미에 상응한다. 관람객이 어사일럼 속에 걸어 들어올 때(come in), 그리하여 병풍에 적힌 기록이 투과광의 힘을 빌려 관람객의 몸 위로 전이될 때, 네 명의 동성애자 군인들은 비로소 자신이 갇혀 있던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나갈 수 있다(come out)고 말하는 듯하다.

 

  제람은 성소수자의 프라이드를 상징하는 길벗체의 공동개발자이기도 하다. 연극 <물고기로 죽기>의 리플렛을 펼쳐본 관객은 트랜스젠더의 상징색을 입은 길벗체가 지면 곳곳에 새겨져 있음을 보게 된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열린 전시와 연극 사이를 잇고 있는 것은 비단 서체만이 아니다. () 변희수 하사를 비롯해 한달 사이에 영면에 든 세 명의 트랜스젠더, 숙대 입학을 거부당한 트랜스젠더, 2017년 군부대 내 동성애자 색출 사건으로 고통받았던 A대위,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구금의 시간을 견뎠을 수많은 성소수자들을 향한 기념의 정동이 두 개의 어사일럼 사이를 비끄러매고 있다.

 

  <물고기로 죽기>는 극장이 어사일럼으로 기능하는 순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연극이다. 빛과 소리를 빨아들이는 검은색 외벽으로 둘러싸인 블랙박스 극장은 일견 구금 시설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래서 소수자 연극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안식처를 찾아온 관객들과 함께 여기에, 더 이상 갇히지 말자는 목소리와 함께 이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극장이 감옥에서 망명지로 나아갈 수 있는 좁은 길을 찾아낼 수 있을까. <You come in I come out>의 전언대로라면, 그 길은 다름아닌 행위하는 몸과 행위받는 몸 사이에 펼쳐져 있을 것이다.

 

  <물고기로 죽기>에서 트랜스젠더 작가 김비가 써내려간 삶의 기록이 배우의 신체와 발화로 전이되는 수행적 과정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띤다. 배우들은 김비에 의한 언어를 읽되 김비로서말하지 않으며, 남성 인격과 여성 인격을 절합적으로 표상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두 배우는 김비의 삶을 인간이 되기 이전과 이후의 시점에서 투시하는 물고기를 표상하는 것 같다. 비늘처럼 반짝이는 의상을 입은 황순미 배우와 무광택의 흑색 의상을 입은 양대은 배우는 때로 등을 맞대고 함께 움직이며, 때로 닿을 수 없는 공간에 떨어져 있는 존재들처럼 외유하고, 때로 외치는 입과 기울이는 귀의 관계를 맺는다. 움직임 연출을 담당한 이윤정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불균형/불안정의 리듬적 표현이다. 연극은 하나의-모순없는-인간으로 살아가라는 세속적 명령을 거슬러온 김비의 삶을 이질적인 두 신체 사이의 리듬적 배치로 번역하고, 그리하여 트랜스적 삶을 가짜로 규정하는 편견의 감옥으로부터 완수되지 않는 몸들의 본연적 자유를 구출해낸다.

 

  다른 신체로의 가능성을 향해 휘어지는 연습으로서의 삶이 고단하지 않을 리는 없다.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자의 고뇌에 관해 이따금 나는 내가 그저 하나의 배제를 또 다른 배제로 교환했을 뿐이고, 거기다 집까지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라고 쓰기도 했다. <물고기로 죽기>에도 가족·사회·문단의 주변부에서 중층적인 배제를 겪어온 사람의 아픔이 알알이 녹아 들어 있다. 그러나 연극은 근육과 관절의 진통을 감내하면서도 스스로의 몸을 헤엄치는 집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의 모습 또한 보여준다. 김비 작가가 젊은 시절 방문했던 지역버스터미널의 풍경들이 무대 위에 차례로 투사되는 장면은 소설 <강철과 이슬의 집>에서 트럭을 기둥 없는 집으로 삼아 주유하는 주인공 성애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과거에나 지금에나 여전히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며 언젠가 다시 물고기로 돌아가기를 희원하는 퀴어. 사별을 통해 만나게 될 날을 그리워하며, 우리도 다시 극장이라는 어사일럼 밖으로 걸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