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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이삿짐들 - 연극 <오르막길의 평화맨션> 본문
이름 없는 이삿짐들
연극 <오르막길의 평화맨션>
김민조(연극비평가)
나는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최종 정착하기 직전의 시대, 종교개혁 직전의 시대, 공산주의 운동 직전의 시대에 엄청난 매력을 느낀다. (…) 내가 볼 때 그 시대들의 메시지는, 상충하는 대의들 가운데 어느 것도 최종적 쟁점의 최종적 결론이 아닐 가능성, 우리로 하여금 대의 없이 사유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해줄 사유방식 및 생활방식이 있을 가능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 사유방식 및 생활방식을 가리키는 더 나은 이름이 없으니, 아니 아무 이름이 없으니, 인본의 방식이라고 부르자.
발터 벤야민이 “어슴푸레한 새벽의 넝마주이”라고 불렀던 20세기 전반기의 사회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그의 유고 모음집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1969)에서 인본주의(humanism)를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로 하여금 대의(大義) 없이 사유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해줄 방식. 상충하는 대의들 사이에 숨어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는 방식. 크라카우어가 희구한 것은 이데올로기 전쟁의 시대로부터 ‘인간’이라는 최저의 레벨을 구출하는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단지 ~이 아닌’, ‘~로만 규정될 수 없는’ 모든 존재성의 대피소로서 인본주의의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크라카우어가 자신의 시대로부터 길어낸 메시지였을 것이다.
반세기가 지나 우리는 All lives matter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제 인본주의는 백래시의 언어를 결집시키는 새로운 대의로서 군림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인간은 ‘단지 여성이 아닌’, ‘흑인뿐만 아니라’, ‘퀴어를 넘어선’ 인식론적 장소에 존재하는 가상의 완전체, 우리가 당도해야 할 최고의 레벨이 되었다. 누구도 여성의 인권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사유방식과 생활방식, 나는 종종 크라카우어가 부정성의 모험을 통해 꿈꾸었던 인본주의가 과연 이런 모습이었을까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 이후, 아니 그 이전에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극을 젠더링/퀴어링하는 실천들은 꾸준히 감행되어왔다. 그중 어떤 연극들은 재공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겨우 2년 남짓의 시차를 둔 반복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공연들은 새삼 우리가 어떤 시간을 건너왔는지 돌아보게 만들어준다. 2021년 현재에는 무성애를 가시화하는 JTBC <런 온> 같은 드라마가 방영되는가 하면,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동성 키스 장면이 삭제된 채 방영되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너 자신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받는 소수자의 시각에서 볼 때 그간 무엇이 변했고 변하지 않았는가. 초연과 재연의 무대를 겹쳐보는 일은 연극의 변화와 함께 유동하는 현재사(史)의 경로를 가늠해보는 일이 된다.
연극 <오르막길의 평화맨션>이 초연된 2018년은 여성 퀴어의 삶을 다룬 연극이 손에 꼽힐 만큼 적었던 시점이었다. 대의나 투쟁을 전혀 표방하고 있지 않으나, 레즈비언/바이섹슈얼 연인의 재회와 이별을 온전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퀴어 관객들을 벅차게 만들었던 공연이었다. 전 여친의 이사를 도와주고 짜장면을 먹는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을 만큼 소박한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이 연극은 스스로를 ‘유령’이자 ‘망가진 인간’으로 인식하는 여성 퀴어 인물들 사이의 돌봄과 공존을 스케치하고 있다. 그들의 시공간은 ‘완전한 인간’, 즉 은폐와 소외로 인한 마음속의 공허를 경험할 필요가 없는 이성애자의 세계 속에 외로운 섬처럼 떠있다. 2021년의 <평화맨션>은 이삿짐 박스로 무대 바닥을 쌓아 두 인물이 내밀하게 대화하는 장소를 좁게 돋우어 놓았다. ‘유진’의 책과 노트로 빼곡히 들어찬 이삿짐 박스는 이 연극 자체가 유령처럼 기화하는 삶 속에서 퀴어들이 메모하고 암기한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바이섹슈얼 인물인 ‘하나’는 옛 연인이 자신과도 얽혀 있는 그 기억들을 짐처럼 나르고 부리는 노동을 곁에서 돕는다. 초연을 본 관객들 또한 동류의 노동에 참여한다. 같은 극장, 같은 이야기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는 유진과 하나를 지켜보며 옛 기억을 겹쳐놓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연극은 결코 같지 않다. 유진은 껍질이 연해져 위태로워 보이고 하나는 이미 그 시간을 거쳐낸 듯이 단단해 보인다. 하나는 사람들을 떠나 고립을 자처하는 유진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존재이다. 마치 하나의 의지에 감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번 공연은 외부의 생활 소음이 앰비언스로 틈입하는 순간들을 구석구석 만들어놓았다. 두 인물이 함께 옥탑극장의 문을 열어젖히고 신촌 동네의 풍경을 내다보는 장면은 여전히 먹먹하다. 초연과 달리 그 문은 공연 후반부에 가서야 어렵게, 그러나 힘껏 열린다. 그 인내의 두께와 해방감의 크기는 지난 3년간 쌓여온 시간들을 방증하고 있다. 벽이 더욱 강고해지는 동안 퀴어들 또한 “여기 누가 살아요”라고 소리칠 용기를 길러왔다는 듯이.
<오르막길의 평화맨션>은 발언하는 연극이 아니라 고백하는 연극이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우리가 걷고 있는 면적을 함부로 늘리거나 줄일 수 없다는 것처럼 신실하게 자기 이야기를 완수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소수자가 연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3년 만에 돌아온 연극은 퀴어와 인간이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항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어떤 핍진성은 대의와 삶을 구분하는 일을 의미 없게 만든다는 것을 다시금 일러주고 있다. 유진이 써낸 문장처럼 일정한 속도로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행성들, 반짝이는 메모들, 차이 속에서 반복되는 연극들은 우리가 기억 속에서 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이삿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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