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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늙은 청년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
-연극 <전윤환의 전윤환_자의식 과잉>
김민조
연극평론가, 연극비평집단 시선 필진
스마트, 혁신, 미래가치. 2010년대의 수많은 청년들을 꿈과 절망으로 밀어 넣었을 단어들이다. 예술 분야라 해서 다르지 않다. 신진과 유망과 중견이라는 트랙으로 계층화되어 있는 지원 사업의 구조 속에서 청년 예술가들은 치열하게 스스로를 증명하고, 소모되고, 어디론가 조금씩 사라져간다. 자기계발과 성장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예술 시장 속에서 놓여 있는 청년 예술가들에게 있어 적당한 시기에 청년을 졸업하지 못하고 적체되는 것은 상시적인 불안과 두려움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더 이상 ‘신진’을 대표할 수 없는 연차가 되었으나 ‘유망’해지지도 못한 상태로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 혁신의 가능성이 소진된 청년.
<전윤환의 전윤환_자의식 과잉>은 전윤환이라는 청년 연극인이 들려주는 출세담과 실패담을 경유해 그러한 종류의 불안과 무기력을 드러내는 연극이다. 자전적이다 못해 자폭적이기까지 한 이 연극은 인정의 정치가 보편화된 경쟁 사회 속에서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감춰두고 있을 법한 자의식을 여과 없이 노출하고 있다. 20대 청년 연극인들을 규합하여 페스티벌을 열고, 청년 세대로서의 상징성을 인정받아 유수의 연출가 동인에 합류하게 되고, 각종 연극상에 수상 후보로 거론되는 등등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전윤환은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문득 정체되어 버렸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도, 기득권의 눈 밖에 난 것도 아니다. 전윤환은 그저 자신이 어느 샌가 중심에서 밀려나 있다는 사실을, 포스트-청년의 단계로 이행하지 못한 채 늙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연극은 전윤환을 재현하거나 그의 자의식을 대변하는 배우들을 통해 그가 서서히 생산력의 고갈이라는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술에 취해 선배에게 대드는 신입 전윤환, 루키다운 치기와 호승심에 사로잡히는 전윤환, “윤환아, 열심히 하지 마.”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맥이 탁 풀리는 전윤환, 최연소 타이틀을 얻고 더 많은 욕심을 내는 전윤환, 그러나 어느덧 연극으로 만들 이야기가 없어졌음을 고백하는 전윤환. 연극은 미학적 술수를 부리는 대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전윤환 개인의 고백과 변명을 무대 위에 한가득 전시한다.
힙스터리즘의 강령을 위반하고 뻔뻔하게 ‘진정성’을 진열하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힙한 전략처럼 보이는 이 연극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필자가 느끼기에 이 연극은 전윤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전윤환을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연극은 ‘연극계에서 살아남기’ 라는 전형적인 서사 담론에 전윤환이라는 케이스를 대입한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정투쟁이나 생존이라는 의제를 초과하는 한 개인의 풍부성이나 독특성은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나’의 불연속성과 삶의 파편성에 주목하는 자전적 다큐멘터리 형식의 연극들과 비교해본다면 이 차이는 더욱 확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무대에서 강박적으로 전시되는 전윤환의 자의식 역시 업계의 시선들에 대한 반응으로 구성되는 대타의식에 가깝다. 그러므로, 그렇게나 많은 전윤환이 고백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엔 전윤환의 인생이 희박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청년 예술가 담론의 비대함과 개인의 왜소함이야말로 이 연극의 토대를 이루는 병리성인지도 모르겠다. 현재 자신의 위치는 어디인지, 유망한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한 ‘나만의’ 스타일은 무엇인지, 사회적 각본 속에 기입된 나는 누구인지를 강박적으로 들여다보며 점점 고갈되어 가는 늙은 청년 예술가의 초상. 그렇게 본다면 <전윤환의 전윤환_자의식 과잉>은 수많은 말들 속에 정작 자신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비로소 발견하고 수용하는 의례에 가까워질 것이다. 고백과 변명을 비워낸 무대 위의 ‘전윤환들’은 그들을 비추는 조명 속에서 침묵의 시간을 공유한다. 예술가의 고독과 내적 성숙을 강조하는 릴케의 편지로 수렴되는 결말부는 다소 나이브한 면이 있으나, 유사한 시간을 견디고 있는 늙은 청년들에게는 차가운 물처럼 예리한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에는 여전히 불편한 지점들이 남아 있다. 연극계 내에서 이미 많은 인맥자원과 발화권력을 가지고 있는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 연출가의 우는 소리는 어떻게 들어도 희떱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적절한 타이밍에 노출시키는 메타인지와 자조성 농담 같은 테크닉이 그 한계를 근본적으로 벌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전윤환이 열거하는 연출가 동인 선배의 이름 중에 이윤택은 소거되어 있는지, 왜 전윤환의 ‘빻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게 가해지는 여러 시선들 중의 하나로 스쳐 지나가는지, 왜 전윤환의 세대를 성토하는 후배 연극인의 목소리는 등장하지 않는지를 극장 바깥에서 곱씹어 보게 된다. 청년은 단지 구조의 잘못에 시달리는 순정한 피해자가 아니다. 늙은 청년이 마주하는 진정한 곤경이란 자기가 여전히 구조의 하부에 있다고 가정한 채 실제로는 하부의 실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자의식이라는 거울은 그 낯선 하부들의 모습을 비출 수 있을까. 철저히 ‘나’의 내면에 귀기울이라고 주문하는 릴케의 편지는 정말로 내적 성장의 약속을 이루어줄까. 어쩌면 우리는 청년을 졸업하는 일에 대해 섣불리 이야기하는 대신, 내 안의 강자성을 노려보는 청년과 계속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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