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항구의사랑
- 코로나19 #
- 시대의어둠을넘어
-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로나 콜른타이 #위대한 사랑 #콜른타이의 위대한 사랑
- 김민조 #기록의 기술 #세월호 #0set Project
- 쿰벵
- 산업재해 #코로나시국
- 쿰벵 #총선
- 518광주민주화운동 #임을위한행진곡
- 권여선 #선우은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김승옥문학상수상작품집
-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염동규 #자본주의
- 죽음을넘어
- 선우은실
- 한상원
- 고려대학교대학원신문사
- 미니픽션 #한 사람 #심아진 #유지안
- 고려대학교언론학과 #언론학박사논문 #언론인의정체성변화
- 보건의료
- 애도의애도를위하여 #진태원
- 수료연구생제도 #고려대학교대학원신문사 #n번방 #코로나19
- 공공보건의료 #코로나19
- BK21 #4차BK21
- 임계장 #노동법 #갑질
- 국가란 무엇인가 #광주518 #세월호 #코로나19
- 5.18 #광주항쟁 #기억 #역사연구
- 심아진 #도깨비 #미니픽션 #유지안
- n번방
- Today
- Total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위기와 곡예, 코로나 시대의 서커스 본문
-김민조 (연극평론가, 연극비평집단 시선 필진)
위기와 곡예, 코로나 시대의 서커스
연극 <재주는 곰이 부리고 –파업->
극장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 연극(적인 것)은 도처에서 상연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설치되는 흥행장이나 천막을 쳐서 만든 가설무대처럼 야외에서 상연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연극은 춤, 재담, 묘기 등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종목들 사이에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닌’ 그런 축제적인 이벤트 속에서 연극이 떨어져 나와 극장의 어둠 속으로 진입한 순간부터 우리가 지금 연극이라 부르고 있는 것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내(소)극장, 제4의 벽, 정숙한 관람 등을 표준적인 규약으로 삼는 서양 근대극의 모형은 1920년대를 지나며 식민지 조선에 빠르게 흡수되었다.
백 년 후인 2020년, 연극은 이제 극장이 문을 걸어 잠그는 접촉 금지의 시대 앞에서 스스로의 역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연극은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와 같은 매체 예술이 부상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이래 늘 열세종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코로나 위기는 연극이 최후의 알리바이로 간직하고 있었던 ‘대면성’ 자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다중이용시설로 묶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극장은 다시 흥행업소의 일종으로 분류되고 있다. 팬데믹과 기후위기라는 장기적인 비상상태 속에서 연극이라 불려온 예술, 혹은 인류학적 행위는 지금까지의 모습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젊은 전통의 뿌리를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인가.
‘원의 안과 밖’이라는 프로젝트 공연팀에 의해 상연된 <재주는 곰이 부리고 –파업->은 현실로 육박해온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파업>은 순수연극이라는 이념형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점차 타자화되었던 서커스(circus)의 현장을 불러들인다. 서커스는 개화기를 전후하여 일본을 경유해 수입된 유럽의 공연 양식이라는 점, 동시에 산대놀이나 가무백희에 기원을 두고 있는 한반도 전통연희의 공연적 요소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극과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 후 연극이 보편적인 예술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과 달리 서커스는 과거의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잔존의 양식’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동춘서커스단에 대한 향수 어린 증언들은 그 좋은 사례이다. <파업>은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는 연극 장르와 컨템프러리 서커스로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서커스 장르가 시점의 차이 속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공연은 스스로를 극장 관리인으로 소개하는 노인 배우 송양헌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극장의 문을 열고 닫는 사람이자 때때로 화장실 칸에 숨어 공연에 대해 관객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는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서, 관리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시점에 다가가고 있는 심경을 들려준다. 당연하게도 그의 방백은 극장에 들어와 재주를 부리던 곰들이 ‘비자발적 파업’의 상태 속에서 관객과 격리되고 있는 현실을 환기하게 만든다. 바깥(객석)을 상실한 안(무대)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이 공연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관객과의 접촉이 벌어지는 장면들은 아득하게 멀어져 버린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를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그 불가능한 간극을 간신히 건너뛰는 ‘곡예’처럼 제시된다.
서커스는 바로 그러한 맥락 속에서 등장한다.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한 인간 신체의 반응-탐색-감행으로 구성된 일련의 에쮸드(Etude) 행위가 서커스적인 것의 원천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곡예는 우리의 삶에 편재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수직 밧줄을 오르내리는 곡예를 보여주는 서커스 퍼포머 서상현은 줄타기의 감각을 유아가 처음으로 앉고, 서고, 걷기를 시도하며 중력과 자신의 몸 사이의 관계를 배워나가기 시작할 때의 감각과 연결시킨다. 마치 영화 <그래비티>에서 지구로 귀환한 주인공이 천천히 중력을 느끼며 척추를 일으켜 세우는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또한 곡예사의 몸은 구명줄을 놓은 채 고공에서 구조물 사이를 건너뛰는 노동자의 몸과 연결되기도 한다.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의 탐험과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서커스는 이미 도처에 편재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파업>이 소환하는 서커스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응시하기 위한 틀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곡예를 부리는 몸을 관찰하고 자신의 몸-언어로 번역하는 관찰자 허윤경의 역할을 통해 그러한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서커스 퍼포머가 수직 밧줄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관찰한 다음 이를 관객석에 연결된 수평 밧줄을 한 자(尺)씩 조심스럽게 풀어나가는 퍼포먼스로 옮긴다. 인체와 줄의 원초적인 관계가 비대면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예술가와 관객의 관계로 옮겨지는 장면이다. 또한 텐트 안에서 서커스 단원들을 관찰하던 그는 그들이 원의 형태로 맞잡은 두 손을 빙글빙글 돌리며 뒤집는 퍼포먼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원의 안과 밖을 뒤집는 이 퍼포먼스는 서커스를 과거의-특수한-전통으로 보는 시선과 현재의-보편적인-사건으로 보는 시선을 뫼비우스의 띠 형태로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이 공연의 주제를 강력히 노출하고 있다. 요컨대 허윤경은 서커스를 ‘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현대인의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으며, <파업>이라는 공연 자체도 그러한 중간매개자의 위치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업’이라는 부제에 걸맞지 않게 이 공연은 예술이라는 노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하다. 아니, 어쩌면 파업 중인 모든 노동자들의 마음이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선고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연극을 비롯한 공연예술은 일찍이 맞이해본 적 없는 새로운 역사적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극은 과연 재건될 수 있을까. 만약 재건된다면 그것을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시작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것이 비자발적 파업 상태에 놓여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공통의 질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8면 > 연극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극사 이후의 연극사를 쓰려면 (1) | 2020.12.10 |
---|---|
늙은 청년에게 보내는 편지 (0) | 2020.11.09 |
도둑맞은 몸들의 생환 (0) | 2020.10.22 |
사라져, 사라지지마 (0) | 2020.05.29 |
리부팅 퀴어 (Rebooting Queer) (0) | 2020.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