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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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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면/연극비평

리부팅 퀴어 (Rebooting Queer)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5. 13. 11:32

김민조

연극평론가, 연극비평집단 시선 필진

 

  “지금까지 나는 사랑에 관해서 썼다. () 그리고 이제 서른이 넘은 나는 그 모래사장에서 처음으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가 말한 사랑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김세희 소설 <항구의 사랑>(2019)의 결말에서 화자는 여고 시절 선배에게 고백을 받았던 목포의 모래사장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소녀가 자라 여대생이 되는 성장소설의 서사 속에서는 지워져야 했을 장소다. 그러나 소설은 한 소녀가 다른 소녀에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적어주었던 곳으로 돌아가 그 단어를 온전히 발음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서술되는 몸과 서술하는 몸이 조용히 화해를 이루는 순간 한 세대의 성장담 속에서 부인되어 온 퀴어적 정동의 복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세희의 원작을 각색한 연극 <항구의 사랑>(극단 Y 제작/강윤지 각색·연출)에서 이 복권의 의례를 수행하는 것은 서로 다른 몸을 지닌 네 명의 연기자들이다. 백혜경(준희 역), 강다현(인희 역), 강서희(민선 역), 박소진(규인 역)은 인물과 서술자의 역할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방식으로 연기한다. 예컨대 준희와 민선이 처음 만나는 장면의 경우, 준희는 민선의 말에 당혹과 설렘을 느끼는 몸을 표현하는 한편 그 몸이 경과하고 있는 상황 자체를 언어적으로 서술해낸다. 서술되는 몸과 서술하는 몸 사이의 모드적 전환(switching)이 매우 자연스럽고 경쾌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두 개의 몸은 마치 불가분리한 율동 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선후 관계를 쉽게 뒤바꾸는 이 가벼운 율동 속에서 우리가 흔히 대립적으로 파악하곤 하는 범주들시제(과거/현재), 장르(소설/), 양식(서술/재현)들은 매번 새로운 짜임으로 얽혀든다.

 

  이를 다시 이야기된 이야기의 연극적 형식화로 정의해보자. 이야기하는 자의 레벨에서 연기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관찰자가 되고, 이야기되는 자의 레벨에서는 보고된 내용을 재현하는 수행자가 된다. 중요한 것은 양쪽의 레벨이 동시에 현행한다는 점이다. <항구의 사랑>이 보여주는 이 독특한 형식성은 주연 인물들이 2000년대 초-목포 지역-여고라는 공간에서 여성애적 정동을 어떻게 경험하고 수용했는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전략으로 읽히기도 한다. 일상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소문, 목격담, 해프닝을 통해 소녀들은 여자를 사귄다는 것에 대해 자신이 모르고자 하는 것보다 많이 알고 있었으며, 안다고 믿었던 것에 비해 더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유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은 그러한 경계적 ()지의 징후였으리라. 그런 까닭에 퀴어적 사건에 대한 매혹과 부인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는 주체가 수행자로서의 자신과 관찰자로서의 자신을 동시에 표현한다는 것은 리얼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연극이 그려내는 소녀들의 퀴어적 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톰보이 스타일을 실천하는 인희는 누구보다 퀴어로서의 표지를 두드러지게 노출하는 인물이지만, 준희는 여성에 대한 사랑을 경험하면서도 인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규인은 준희의 단짝 친구이지만 그들이 팔베개를 한 채 누워 있을 때에는 그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강력한 퀴어적 정동이 발생하곤 한다. 이처럼 소녀들의 신체와 욕망 사이에는 해석이라는 불투명한 지대가 존재하고 있다. 훗날 준희가 그건 다 뭐였을까?” 라는 인희의 질문과 함께 귀환하게 되는 지점도 그러한 해석의 지대, 이해의 공란이었으리라.

 

  인희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한때 인희를 데미안으로 여겼던 준희와 여고의 소녀들은 비규범적 실천을 거침없이 수행하는 인희를 경원시했다. 그래서 소설가 김세희는 준희의 목소리를 빌려 그녀의 실추된 데미안을 이렇게 기렸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그 애 자신의 표현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다. () ‘남자처럼 짧은 머리라는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린 뒤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인희와 같은 친구들을 기억하게 만든 것이 페미니즘 리부트의 성과라 말하고 넘어가는 것은 충분할까. 퀴어적 신체의 복권을 다루는 서사 내에서도 온전히 이야기될 수 없었던 이반들, 불안한 눈빛과 발걸음으로 젊은 날을 서성거렸을 인희와 같은 사람들의 아픔이 보상될 수 있을까. 어쩌면 연극 <항구의 사랑>이 원작과 달리 인희와 준희의 재회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그러한 지점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서사의 봉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틈새 사이로 인희가 있었던 자리를 들여다봐야 할 책임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 이후 한국의 젊은 연극인들은 페미니즘 연극의 가능성을 꾸준히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항구의 사랑>은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일상사()의 두께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2020)와 동심원 관계를 그린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유동하는 욕망과 정체성의 문제를 그린다는 점에서는 <로테르담>(2019)의 구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여성적인 것의 형성을 역사화하기에 도전하는 페미니즘 연극이 퀴어 연극의 자장에 접촉하여 진동을 일으키는 국면들이 관찰된다는 점이다. <항구의 사랑>으로부터 퍼져나간 진동이 퀴어-페미니즘 연극을 모색하는 창작자들에게 또 다른 자극을 선사하기를 기대해본다.

 

 

 

연극 <항구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