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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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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면/연극비평

사라져, 사라지지마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5. 29. 12:07

- 김민조 (연극평론가, 연극비평집단 '시선' 필진)

 

 

사라져, 사라지지마
  - 연극 <기록의 기술>


  연극은 사라진다. 연극이 상대적으로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끝난 후>(1980)라는 곡이 40년 가까이 애창되고 있는 이유는, ‘연극’이 모든 신기루적 체험을 상징하는 단어로서 우리의 심적 사전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극은 빈 공간에서 홀연히 나타났다가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다가오고 사라진다는 것은 곧 일상의 성질,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로서의 삶이 본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이기도 하다. 연극이 삶의 정지인 동시에 삶 자체에 대한 은유가 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연극을 기록하는 평론가는 반드시 연극의 저항을 경험하게 된다. 기억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언어라는 매개를 거칠 때 소실되는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관극의 체험은 실로 공유 불가능한 감각질(qualia)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기록 행위의 불완전성을 의식하는 기록자는 줄거리나 대사 너머에 있는 느낌의 총체를 어떻게 기술할 것이냐의 문제를 풀어가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롭게도 <기록의 기술>(0set프로젝트 제작/신재 연출)은 당사자의 목소리로 연극을 만드는 이들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기술(description)을 위한 기술(skill)을 고민하고 창안하는 과정 자체를 이 연극은 다루고 있는 것이다. 

 

  ‘2020 세월호: 극장들’ 페스티벌 참가작 <기록의 기술>의 주인공은 지금도 여전히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고 있는 세월호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육성을 기록해온 활동가들이다.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이 지은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창비, 2019)가 이 공연의 핸드북이 된다. 관객은 녹음된 인터뷰 내용을 듣고 그에 대응하는 기록물을 읽는 과정을 반복하며 그때-거기에서 발화된 말과 지금-여기에 남아 있는 글 사이의 틈새를 감각하게 된다. 그 과정은 글자가 배열되어 있는 이차원적 표면이 기실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는 퇴적층임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녹음기록의 주인인 세월호 가족들과 활동가들 역시 시간의 흐름이라는 테마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잊혀지는 것의 두려움, 잊으라는 말의 괴로움,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의 느낌, 다시 세월호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것의 느낌에 대해. 유가족이 경험하는 시간의 모습에 대해 작가기록단에서 활동 중인 이호연 작가가 증언한 내용은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다. “과거, 현재, 미래 연속적 개념으로 시간을 사유하기 쉬운데, 아닌 거죠. 한 마디로 이 분들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의 시점이 현재의 시점이에요. 2014년 4월 16일로 오늘도 몇 번씩 돌아가거든요.” 

 

  이호연의 증언은 공연에서 배부된 투명지에 인쇄되어 있고, 생존학생 이시원 엄마 문석연의 구술이 기록된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31페이지의 내용에 겹쳐서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기록의 기술>은 이처럼 당사자와 기록자의 관계를 ‘겹’ 혹은 ‘곁’의 관계로 제시한다. 작가기록단 박희정이 “곁의 존재로서의 기록자, 일방적으로 존재를 해석하고 써내려가는 권리를 가진 자로서의 기록자가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기록자”라고 언명하고 있듯이, 이 공연의 제작자들은 세월호 기록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기록이 지닌 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공연은 혜화동 일대의 골목길을 각자 산책하는 일로 시작된다. 관객은 인터뷰 내용을 듣거나 읽으며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 사이를 천천히 지나쳐 간다. 나뭇가지를 다듬는 주민들, 소리 내어 웃으며 걸어가는 학생들,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리는 직원들을 스쳐가며 지난 6년 간 흘러온 일상의 시간들을 반추해보게 되는 것이다. 산책길을 걷다가 마주치게 되는 ‘함’ ‘께’ ‘함’ ‘으’ ‘로’ ‘써’라는 글자들은 우리의 일상에 문득 세월호가 귀환하곤 하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산책을 마치고 극장에 돌아온 관객들은 희미한 조명 속에 놓여 있는 빈 종이와 책상들을 보게 된다. 어두운 극장은 기억이 가동되는 장소, 혹은 사라진 것들을 기념하기 위한 장소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다. 창문이 나 있는 두 개의 격벽 사이를 거니는 동안 관객들은 이 장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침묵 속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 모든 과정은 ‘자신의 세월호’를 다시 감각하도록 돕는 과정이자, 관객이 당사자들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앉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빌드업이기도 하다. 5월 10일 8시 공연에는 생존 학생 이시원 엄마 문석연과 작가기록단 이호연이 게스트로 등장해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당사자 게스트들은 참사 이후 겪어낸 일상과 투쟁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관객들은 그에 화답하여 자신의 기억과 상념을 들려주었다. 미안함이나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기 위해, 세월호를 무대 저편의 ‘의제’로 놓아두지 않기 위해 <기록의 기술>은 우리 모두가 서로의 기록자가 되는 관계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은 끝내 불완전할지 모른다. 그러나 0set프로젝트는 실재와의 간극에 절망하는 대신 새로운 대화를 일으키는 매개물로서 기록이 지닌 힘을 꿋꿋이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을 망각의 수순으로 이해하는 대신 그 안에 내재된 재생과 지속의 가능성을 믿고자 하는 태도. <바람없이>(2019)가 연대 활동가들이 외롭고 지난한 투쟁을 지속하는 원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공연이었다면 <기록의 기술>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반추하게 만드는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라지는 사건으로서의 연극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기술. 극장을 메타기억의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0set프로젝트의 귀한 노동이 오래 지속되기를 고대한다.   


@0set Proj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