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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역자와의 대화- 역사의 개념을 정초하고, 개념의 역사를 다시 쓰다 본문
-최호근 역, 라인하르트 코젤렉 外 등저,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역사』, 푸른역사, 2021.
Q : 2010년에 시작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시리즈』(이하 『개념사 사전』) 완역 작업이 10년 만에 드디어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하시게 된 개인적인 동기가 있다면 무엇인지, 그리고 역사 전공자이자 전문가로서 어떠한 취지에 공감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A : 『개념사 사전』의 중요성은 이미 석사과정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학원 선후배들과 원본 다섯 권을 복사해서 제본했죠. 그 일이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독일 빌레펠트(Bielefeld) 대학교에서 유학할 때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코젤렉 선생님이 제 석사과정 은사이신 이상신 선생님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였기에, 이 선생님의 선물을 전하기 위해 연구실을 방문한 거죠. 그 후 몇 차례 더 뵈면서 인연이 두터워졌습니다. 코젤렉 선생님은 빌레펠트 대학교의 기초를 닦으셨고, 그 후 교육학의 쉘스키(Helmut Schelsky), 사회학의 루만(Niklas Luhmann)과 더불어 빌레펠트를 대표하는 석학이 되었습니다. 책의 중요성과 필진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개념사 시리즈 번역을 추진한 한림대학교의 박근갑 교수님으로부터 요청을 받고 즉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Q : 번역 작업도 물론 긴 여정이었지만, 『개념사 사전』의 기획은 1972년에 시작하여 1999년에 끝난 25년간의 대장정이었습니다. 기획자이자 저자인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신념과 끈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작업이었는데요. 학문적 업적과 사회적 참여를 포함하여 코젤렉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덧붙여 『개념사 사전』이 그의 생애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 사람들은 코젤렉을 독일 최후의 교양시민(Bildungsbürger)으로 일컫습니다. 훌륭한 역사가였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현안에 대해 날카로우면서도 절제된 논평을 할 줄 알았던 지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의 전통을 이해하는 가운데 방법적 혁신을 부단히 시도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프로이센 역사 해석으로 젊은 시절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코젤렉은 ‘지나간 미래’,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의 융합’ 같은 개념적 화두를 제시하면서, 역사에서 시간의 문제를 깊이 천착했습니다. 말년에는 ‘정치적 사자(死者) 숭배’ 개념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 이후 집단 정체성 형성에서 기념이 갖는 의미를 규명했을 뿐 아니라, 도상학적 해석의 경로를 보여주기도 했죠.
코젤렉에게 현실은 미래에 대한 희망, 과거에 대한 인식이 현재의 실천 속에서 한데 녹아들면서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과거의 분석에 함몰되거나, 상아탑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베를린 한 복판에 있는 신경비대(Neue Wache) 같은 공공기념물이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을 때, 이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추진했던 수상 헬무트 콜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장소가 독일인의 가해 책임과 희생자들의 존재를 모호하게 만들 것이라는 코젤렉의 비판은 독일 시민사회의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콜은 유대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국가기념물을 세우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베를린 한복판에 세워진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홀로코스트 상기기념물(Holocaustmahnmal)입니다.
코젤렉은 인간 역사의 비합리성을 역설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 자세는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2차 대전 때 독일 병사의 일원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오랫동안 벌목공 생활을 했습니다. 지옥 같은 전쟁을 체험하면서 그는 과거에 계몽사상가들이 주장했던 합리적 거대 기획에 대한 믿음을 버리게 됩니다. 단선적인 우상향 지향의 역사에 대한 신념을 버릴 때, 비로소 여러 방향에서 역사를 만들어온 수많은 힘의 결들이 우리 시야에 들어옵니다. 코젤렉의 저작들은 이런 유연한 시각을 우리가 가질 수 있게 해줍니다.
코젤렉의 학문적 기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개념사’ 개념을 제시하고 『개념사 사전』을 편찬한 것입니다. 『개념사 사전』의 부제가 말해주는 것처럼, 코젤렉은 ‘정치-사회적 언어’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서구 근대 문명의 생성변전 과정을 가장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민사회, 민족, 혁명, 위기, 동맹 같은 언어는 근대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근대 이후에 와서 다양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현실의 문제를 의식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통해 집단적 결속과 행동을 촉발하는 내용적 형식으로 기능해왔습니다. 코젤렉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한 거죠. 그리고 코젤렉은 이 언어의 함의가 급속하게 변화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했습니다. 하나의 표현 속에 다양한 의미내용들이 공존하면서, 끝없는 적자생존의 경쟁 과정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 결정(結晶)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의미를 강하게 띤 119개의 개념들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야말로 근대 사회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가늠하고, 그 가운데 왜 특정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는지를 탐색하게 해주는 단서를 제공해줍니다. 때문에 『개념사 사전』 작업은 코젤렉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기에 충분합니다.
Q : 이 책은 ‘단수 집합명사로서의 역사(die Geschichte)’ 개념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수 집합명사로서의 역사 개념의 의미와 의의는 무엇이며, 이 개념이 『개념사 사전』 전체를 관통하는 코젤렉의 ‘근대성’에 대한 성찰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A : 코젤렉은 「역사서술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역사학을 ‘종합의 학문’으로 규정했습니다. 정치사, 문화사 같은 영역별 역사, 고대사, 현대사 같은 시대별 역사, 지역사, 국가사, 지역사 같은 영역별 역사 등의 개별 역사서술을 하나로 묶는 상위의 통합적인 역사서술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했죠. ‘단수 집합명사’로서 역사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의 유의미한 과정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역사의 시작과 끝, 전개 패턴과 법칙, 전체 과정을 이끌어가는 힘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통일적인 해석의 틀에 대한 요청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있어왔습니다. 개인의 행위나 사건, 어떤 나라나 시대가 얼마나 의미 있었는지도 이런 틀이 있어야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로 올수록 여기에 하나의 강력한 요소가 추가됩니다. 우리 인간이 이 역사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현재 이후의 세상을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인간 능력에 대한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자신감과 기대감이 계몽의 18세기에 와서 강하게 표출됩니다. 백과전서 편찬의 유행한 것이나 보편사, 세계사 서술이 서유럽에서 앞 다투어 이뤄진 것도 그 예시라고 할 수 있겠죠. 경험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좀 더 합리적인 사회, 좀 더 풍요로운 사회, 좀 더 갈등 없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시기 시민계급 사이에서 팽배하게 된 겁니다. 부르주아지는 이성적 사회의 견인차인 자신들의 출현과 성장 과정을 역사의 필연으로 묘사했습니다. 모든 물길의 흐름을 아우르며 도도하게 흐르는 거대한 강물에 ‘바로 그 역사(the history)’를 비유한 거죠. 역사를 수레에 비유하고, 부르주아지들이 그 바퀴를 밀고 가는 사람들, 곧 역사 발전의 담지자(transporter)라고 주장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입니다. 각각 고유한 특성을 갖는 개별 인간들을 포괄하는 ‘인류’처럼, 역사는 들쭉날쭉한 개별 역사들을 넘어 인간과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는 포괄적 유(類) 개념이 된 거죠.
물론 오늘날 역사가들은 실제 역사가 단일한 동력에 의해 통일적으로 펼쳐지는 과정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차대전과 홀로코스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시베리아 벌목공 생활 같은 야만적 사건들을 체험한 코젤렉 역시 인간의 합리성과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의 힘에 대해 깊이 회의했기 때문에, 단수 집합명사로서 역사에 대한 믿음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코젤렉은 인간의 역사를 성찰하듯, 역사 개념의 생성변전을 긴 호흡에서 성찰적으로 조망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번 번역서 『역사』입니다.
Q : 정제된 역사 개념은 희망과 투쟁의 구호로 쓰이기도 했지만, 지배 이데올로기와 만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호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히틀러가 견강부회 식으로 주장했던 ‘역사의 심판’이라는 논리가 바로 그 예시일 텐데요. 이처럼 역사 개념이 어떻게 오해·오용되어 왔으며,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반증하는 역사 개념의 한계는 무엇인지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또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역사를 봅니다. 역사서술을 소비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아직도 역사의 의미를 명료하게 강조하는 서술을 기대합니다. 또 역사의 진행 방향, 전개 패턴, 동력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내러티브일수록 사람들을 매혹하는 힘이 강합니다. 19세기에 와서 역사는 거의 종교 반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시민계급, 노동계급, 민족의 이름으로 쓰인 단정적 역사서술이 유행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학자들은 ‘역사종교(Geschichtsreligion)’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대체 불가능한 확신을 부여해주는 점에서 역사서술은 자칫하면 종교화, 이데올로기화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차원이 아닌 이상, 역사를 하나의 유의미한 흐름으로만 파악하는 태도는 큰 위험을 초래하기 쉽습니다. 생태계 속의 복잡한 흐름들을 하나의 큰 줄기로 간주하는 자세는, 다양한 목소리를 모노톤으로 재현하는 연극처럼 재미없죠. 그러므로 역사의 의미를 실체적 차원에서 제시하기보다는 다양한 시각과 입장의 환산을 통해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도모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푸코 식의 해체적 접근도 하나의 대안이 될 겁니다.
Q : 근대의 종언과 함께 ‘역사의 위기’가 도래했음에도 ‘역사’라는 개념에 대한 고민이 왜 계속해서 이뤄져야 하는지, 이 고민 속에서 개념사 연구는 앞으로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 베버는 인간의 특성을 문화적 존재라는 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무질서한 현상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의미 없는 현상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본성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해 가능하고 파악 가능한 세상, 우리 손으로 변화시켜갈 수 있는 세계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참 답답하겠죠. 끝없는 경험적 지식의 탐구를 통해 세상의 패턴을 파악하고, 변화의 추세를 파악하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소망이며, 피하기 어려운 집단적 기대감일 겁니다. 이런 소망과 기대가 존재하는
한, 집합단수 명사로서 역사에 대한 요청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개념사는 정치-사회적 언어들에 의해 틀 지워지는 인류의 역사, 특히 근대 이후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역사 현상 기저에서 작동하는 언어들의 배태-형성-변화 과정을 긴 호흡에서 탐색함으로써, 오히려 역사를 움직여가는 단일한 힘에 대한 신화의 허구성을 깨닫게 해주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볼 때, 개념사에는 계몽적 효과도 담겨 있습니다. 요즘 인민이나 민중으로 번역되는 ‘people’이 수백 년 전 프랑스에서는 그저 ‘지저분한 무리’라는 부정적 의미만 갖고 있었습니다. 개념이 복잡다단한 세상의 단면들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코드라면, 개념사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세상의 변화를 근접해서 추적하게 해주는 측정 도구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인터뷰·정리 : 이영서 기자 youngseo51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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