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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혐오의 종식을 바라며 본문
김위정(법학과 박사과정)
2020년 4월호 대학원신문의 첫 면은 4년 만에 돌아온 총선의 환경에 대한 사회진보연대의 평론으로 시작했다. 다음 면에는 대학원 구성원들과 연구자, 교수님 등의 기고가 이어졌고, 학계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사도 볼 수 있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기획기사였는데, 3면의 기획기사는 래디컬 페미니즘 중에서도 트랜스 배제 래디컬 페미니스트, 이른바 터프라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의 트랜스젠더 배제와 관련된 글이었다. 다른 기사들에서도 타자화·혐오의 풍조가 만연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논설이 횡행하고 있다는 문제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근 몇 년 간 지속되어 왔다. 예를 들면 불순분자로 몰려 수년간 탄압 당했으나 명예를 회복하였던 지역은 다시 ‘그 지역’이 되었고, 아이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안겨주고자 하였을 뿐이었으나 국가가 지켜보는 앞에서 백주대낮에 아이들을 잃어버리고 만 사람들은 ‘그 유족’이 되었다. 그 외에도 다른 집단을 타자화하는 시선은 수 없이 많은데, 공통적으로 그 대상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고, 그 이유는 그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정당한 이유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혐오 발언을 일삼는 집단은 집단의 성격 자체로 정당성을 갖기 어렵다. 앞서 든 사례를 재차 언급하면,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일치하여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광주의 오월과 사법부가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진도의 사월의 피해자들에게 비난을 일삼는 행위에 관해 우리 사회가 정당성을 인정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혐오 발언자들은 비난의 대상이 부당하다는 점을 통해 스스로의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백 보를 양보하여도 혐오 발언자들의 기획은 소수자들이 진정 부당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인상비판을 가하면서 이를 논리라고 부르는 수준에 그칠 뿐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타자화는 개인의 자존감과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도구라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뒤집어보면 혐오 발언자들의 자존감과 소속감은 무너져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혐오는 정작 보호가 필요한 것은 자신임에도 엉뚱한 사람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불만의 표출일 수 있는 것이다. 혐오 발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집단의 분위기는 스스로를 패배자나 친구 없는 사람으로 칭하는 것은 물론, 진지하게 삶의 가치와 사회적 연대감이 결여되어 있음을 호소하기도 한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일련의 여성에 대한 살인사건 이후에 한국에서 성행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터프 등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내세우는 트랜스젠더 혐오의 정당화사유인 ‘여성 안전’도 같은 취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기반을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처지에 있는 것은 가여운 일이지만, 타인을 위협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이해해주기 어렵다. 그 타인이 소수자로서 사회적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다만 혐오 발언자들에 대한 사회적 제재를 강화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엄벌주의는 또 하나의 배제수단일뿐더러, 그 효능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은 형사정책학의 영역에서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혐오 발언을 억제하면서도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려면 다른 생각이 필요하다.
신문에서 볼 수 있었던 여러 기고문은 이 지점에 대해서 생각해볼만 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가령 3면에서 나영 셰어 대표는 안전은 모두의 문제인바 남성들도 젠더폭력에 대한 성찰을 통해 젠더구조를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모두가 성별이분법에 의하여 남성성·여성성을 강요받고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사회적 연대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2면의 원우발언대에서 강의의 형태를 다양화하고 강연의 폭을 넓히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인식의 공유를 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생물학적 성 차이를 존중하면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한 쪽이 부당하게 혜택을 받고 있다는 혐오의 기초를 제거하는 것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회적 연대감을 회복하고 혐오의 기초를 제거하는 수준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관념의 수준에 멈춰 있어서는 공허한 상황만이 남기 때문이다. 혐오를 방지하고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이고 엄밀한 제도·정책이 필요하다. 3면의 기획기사에서 홍성수 교수님을 인용하여 외국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이미 외국에서는 여성의 안전을 고민하면서도 혐오를 넘어설 수 있는 실증적 사례가 있다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 혐오가 만연한 다른 영역에서도 위 사례 등의 참조할 만한 다양한 사례를 반영하여 제도·정책을 연구·개발함으로써 혐오의 발생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야당 일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새어 나오던 혐오 발언 때문이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비록 우리 사회에 혐오 발언이 만연하다고는 하나 발언의 수가 많다는 점에 불과할 뿐 많은 사람들은 혐오 발언을 명백히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잘 드러내는 사정이라 할 것이다. 5면에서 석영중 교수님이 소개해주신 도스토옙스키의 시각처럼, 아직 우리에게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옳고, 그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인식이 충분히 남아 있다.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타인에 대한 배제와 혐오를 잠식시킬 수 있기를 막연하게나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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