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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전염병, 기후, 차별과 평등, 피해와 가해라는 단어들의 실감 본문
전염병, 기후, 차별과 평등, 피해와 가해라는 단어들의 실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박재연
누구나 그렇겠지만, 추상적이고 개념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단어들이 하나의 실감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이제 ‘전염병’ 같은 말은 온라인 수업이나 마스크 혹은 조명이 꺼진 간판들로 조용한 밤거리를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만들고, ‘이상기후’ 같은 말은 도무지 빨래를 할 수 없는 날씨가 계속되는 나날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만든다. 대학원신문 246호를 읽고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1면 기획 인터뷰는 파리기후협약을 코로나와 이상기후 시대와의 연관성 속에서 다루고 있어 가장 시의성 있는 그리고 크게 와닿는 주제와 내용의 기획 인터뷰였다. 전망이 긍정적이어서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단순한 낙관은 아닐까 의구심과 불안감이 생기기도 했다.
3면에서 다룬 포괄적 차별금지법 관련 기사도 절박한 마음으로 읽었다. 홍성수 교수의 말처럼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된다고 해도 그것이 실질적 효력을 지니거나 직접적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형사처벌 조항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이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세상을 향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홍성수 교수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된다면 법은 홍교수가 말한 방식대로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갈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차별금지법의 통과라는 그 사건 자체가 가져올 변화이다. 우선 이것은 법을 반대하는 세력에게 이런 일로는 동성애가 유행하지도 않으며 세상이 망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법의 통과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줄 것이다. 변하는 것이 많이 없다고 해도 변화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는 것과 믿을 수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우리들의 비빌 언덕이 되었으면 좋겠다.
1면과 3면의 기획 인터뷰, 기사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다 재미있게 읽었다. 문화면은 항상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번에는 미니픽션이 실려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5면 책세상을 읽고는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책 두 권을 추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은, 계속 곱씹어 생각하게 될 것 같은 글은 7면에 실린 사설이었다. ‘가해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대의 혹은 선의를 담지한 자들이 가해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가해에 주목하는 한편 이러한 가해의 원인을 ‘선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찾고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최은영의 단편소설 「신짜오신짜오」였다. 이 소설에도 가해자의 자리에 서는 것을 불편해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은 독일에서 베트남인 이웃을 만나게 된 한국인으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형을 잃은 인물이다. ‘가해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다룬 이 소설에서도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은 인물로 하여금 끝내 가해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설은 가해의 일상적 성격에 그리고 그러한 일상적 가해가 쉽게 가해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것에 주목했지만, 소설을 보면 가해의 인정과 선함이나 대의에 대한 믿음은 역사와 일상을 동시에 관통하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선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믿음이 정말 무서울 때는 이러한 믿음이 자신은 선한 사람이라는 믿음과 합쳐질 때다. 자기 증명을 위한 잔인함은 가해자가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데까지 다다를 수 있다. 가해자임을 부정하기 위해 가해자들은 피해자성을 외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려고 한다. 이런 알리바이는 이를테면 일상적 성차별의 차원에서는 ‘남자도 힘들어’라는 말로, 보다 역사적인 차원에서는 ‘우리도 원자폭탄에 의한 전쟁 피해자야’라는 말로, 그리고 문학 작품에서는 「신짜오신짜오」에서처럼 전쟁 때문에 가족을 잃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추상적, 개념적 단어들이 실감을 지니게 됐다는 말로 글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차별이나 평등, 피해, 가해라는 말도 최근 들어 부쩍 실감을 지니게 된 단어다. 이 단어들이 추상적, 개념적 단어로 있을 수 있었던 건 그간의 삶이 평탄했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제 가해라는 단어는 일상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는 하나의 기준으로, 실감을 지닌 말로 자리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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