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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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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면/쟁점기획

오염된 땅에도 역사가 있다(인천조병창, 보존과 철거 사이에서)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10. 17. 16:41

오염된 땅에도 역사가 있다

-한반도 병참기지화의 흔적 인천조병창, 보존과 철거 사이에서-

 

지난 617, 인천광역시 미군 부대 캠프 마켓(Camp Market) 인천 일본육군조병창(이하 인천조병창)” 병원 건물 근방에서 토양오염이 발견되며 해당 건물의 철거 결정이 내려졌으나 잠정 유보되었다. 이에 여러 시민 및 전문가들은 인천조병창의 역사·학술적 의미를 강조하며 철거를 반대하고 있다. 인천조병창은 전시기 일제가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하여 소총, 탄약, 포탄 등을 제작한 곳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가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세운 거대 군수공장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 부대 캠프 마켓의 공간으로 흡수되었고 최근 인천시에 반환 후 공개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한국근현대사에서 유의미한 공간 속 인천조병창의 철거 결정 과정과 주요 쟁점, 그리고 병원 건물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인천대학교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 이연경 학술연구교수를 만나 관련 내용을 물었다.

 

전시기(戰時期) 군사도시의 형성

 인천조병창은 일제강점기 당시 무기 제작소로, 해방 이후에는 미군 부대 캠프 마켓이 주둔해왔던 곳이다. 이 공간이 생겨난 배경과 그동안 어떻게 활용됐는지에 대해 물었다.

 “1930년대 일제는 조선에 대한 중공업 도시화 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에 대한 대비를 위해 경인 시가지 계획을 설립했고 부평 지역을 본격적인 군수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인천조병창의 정식명칭인 인천일본육군조병창제1제조소가 무기 제작을 위해 설립됐고 1941년 개창한 후 5년간 총검류의 핵심 생산기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일본놈들이 동전, 수저, 놋그릇 등 집안 살림살이까지 다 가져갔다는 옛이야기처럼 실제로 이곳은 무기 제작을 위해 많은 자원과 인력이 모였던 장소입니다. 그 흔적으로 과거 건물이 있던, 지금은 아파트 단지인 지역에서 동전이 엄청나게 발굴되었는데 중국제 동전까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조병창의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이를 둘러싸고 미쓰비시 제강, 닛산 자동차 등 군수물자와 관련된 다양한 기업들이 총집합했고 노동자를 위한 수용시설, 양성소, 병원 등이 생겨났으며 수많은 사람이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당시 이 곳에 동원당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소학교를 다니다가 차출되어 조병창 공원양성소로 오거나, 군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해 이 곳에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에게 총검 만드는 기술을 가르친 다음 공장에 투입하는 구조였던 것이죠. 1944년 후반에는 일본이 패전 직전이었던 만큼 수도권 각 지역에서 정말 많은 학생을 데려왔는데 실제로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대부분 10~20대로 매우 어렸습니다.

 해방 이후 이 지역은 미군의 주둔지가 되었다가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으나,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잠시 북한군이 차지했다가 다시 미군기지가 되는 등 굉장히 복잡하게 바뀝니다. 1953년에는 미군기지가 정식으로 설립되며 미군의 군수지원도시를 칭하는 에스컴(Ascom: Army Service Command)시티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이곳에 전체 미군 기지로 보급되는 모든 물자와 병력이 우선적으로 모이는 만큼 거대한 규모를 보였습니다. 당시에 있던 여러 공장 중 제빵 공장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이는 시티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단순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창고 지역을 넘어 수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하나의 거대한 도시였다는 흔적을 보여줍니다. 1971년 미군이 축소되며 에스컴시티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했고 이후 많은 부분이 용산 기지로 옮겨집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 주거시설은 지금의 부평의 아파트 단지로 남게 되었고 현재는 조병창이 위치한 캠프 마켓 지역만 남게 되었습니다.”

 

인천조병창의 역사적 의미

 인천조병창은 일제가 자행한 국내 강제동원의 명백하면서도 희귀한 증거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병원 건물은 관련한 많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에 인천조병창이 한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인천조병창 병원 건물 자체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인천조병창은 일본 본토 내 도쿄, 사가미 등 여러 곳이 존재하고 부평, 평양 등 식민지에도 일부 건설되었습니다. 부평은 인천 항구와 서울의 중간 지역으로 지리적인 이점이 크다는 장점이 있어 본토 외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든 조병창입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시대에 우리나라 땅이 일본의 제국 전쟁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와 더불어 유일하게 조병창 전체가 남아있는 곳이기에 그 역사적 가치가 큽니다. 또한, 일본은 메이지 산업화 유산이라는 것을 산업화라는 명목으로 잘 포장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만들면서 자신들의 침략 역사를 감추고 있습니다. 전쟁의 흔적이 아닌 자랑스러운 산업화의 흔적’,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산업혁명에 성공한 국가라는 타이틀로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부분을 동조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도시가 그 흔적으로 인해 피해받았고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과 산업에 동원되었던 역사가 고스란히 건물로 남아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점입니다.

 현재 논란의 중심에 있는 병원 건물은 948년 미군 기록에 의하면 400병상 규모의 큰 병원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병원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의 폭격으로 건물 중앙, 서편 등 대부분이 사라지고 동편의 1, 2층이 남아 폭격 이후에는 미군의 연회장, 장교숙소 등으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사실 캠프 마켓 내 여러 구역 중에서 대다수의 중요한 건물이 남아있는 곳은 D구역인데 이는 아직 반환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반환된 B구역의 병원 건물의 가치가 높게 평가됩니다. 위안부 징용을 피해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시던 한 선생님의 인터뷰를 통해 해당 병원의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조병창의 특성상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다쳐 병원에 실려 왔고 이 지역에 가장 큰 병원이었기에 주변 공장 사람들까지 모여 정말 많은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합니다. 산업도시에서 병원은 못 쓰게된 사람을 빨리 고쳐서다시 일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병원은 이런 위험과 아픔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곳이고 그래서 이 공간은 조병창의 일부 상징적 기능에 대한 의미를 잘 보여주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천조병창은 일제강점기를 보여주는 장소로도 중요하지만, 미군기지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소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병창 있던 에스컴시티는 당시 부평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이었습니다. 현재 부평에 GM대우 공장 등 산업단지가 설립된 전체적인 배경에서는 조병창과 에스컴시티가 도시사()적인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그 연속성 상에서 부평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살펴보고 그 도시를 해석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강제 동원되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인터뷰를 보면 당시 어린 손으로 본인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몰랐다고 해요. 생산과정에 따라 공장 내 업무가 나뉘었는데 마치 각 절차에 있는 부품처럼 일했고 본인이 했던 업무 외 전체적인 부분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최종 제작된 총을 쏘며 검사하는 일만 몇 년을 하셨다는데, 하루종일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거의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처럼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아픈 역사를 잘 보여주는 곳이며 우리가 주권과 평화를 잃었을 때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아직 이 공간을 경험하신 어르신들이 아직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 기록을 좀 더 적극적으로 조사해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천조병창 병원 건물 철거 결정의 배경

 지난 6월에 인천조병창 병원 건물에 대한 철거가 문화재청의 요청에 따라 잠정 유보된 상태다. 현재 국방부와 인천시, 캠프 마켓 시민참여위원회(이하 시민위원회) 등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고 있는 이 사안에서 실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와 철거의 주된 요인으로 제기되는 토양오염 문제와 관련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역사·사회적 의미가 있는 건축물을 보존하는 사안에는 먼저 사회적 합의가 요구됩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캠프 마켓 B구역 내 세 건물에 대한 보존을 권고했고 인천시도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건물 전체를 보존하겠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환경문제 등 여러 문제로 여론이 형성되며 오염이 있는 지역 내 모든 건물의 철거 결정이 내려졌고, 그 과정이 급작스럽게 진행되면서 일각에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언론에 알려진 것과 달리 맹독성 오염지역은 병원 건물이 위치한 B구역이 아닌 A구역입니다. B구역의 오염은 유류 탱크로 인한 기름 오염이 주원인으로 이 경우 철거가 필수도 아니고 이미 많은 산업시설이 문을 닫고 방치되는 과정에서 기름 오염 정화 기술은 다양하게 발전해왔습니다. 조병창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한다면 이를 존치하고 오염을 제거하는 방식을 찾는 것이 우선인데 갑자기 시설물을 전부 없애고 정화해야 한다는 논리로 진행이 된 것이죠. 시설물을 보존하며 정화하는 경우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비용과 시간이 더 많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 경우 지자체가 떠안게 되는 경제적인 부담과 예정된 공원 개장이 미뤄지게 되는 등의 이유로 결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이유 속에서도 역사적 가치를 높게 사 그 부담을 충분히 감당하는 방향으로 진행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용산 미군기지의 경우 다양한 부·처가 공동으로 조사에 들어가 각자 역할에 맞춰 검토해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문화재청은 문화재적인 측면에서, 국토부는 토지적인 측면에서 같이 말이죠. 이런 식의 협의 과정이 지금까지 4년 이상 진행되고 있지만 캠프 마켓은 이런 과정의 부재가 아쉽습니다.

 환경단체와 역사·문화유산 전문가들 간의 견해 차이 역시 존재합니다. 인천시에서는 시민위원회를 만들어 존폐의 결정권을 맡겼지만, 실질적으로 위원회 안에서 부평 지역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결론적으로는 지자체에서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못해 각자의 주장이 난무하고 그로 인해 협치가 잘 이뤄지지 않아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관련 문제가 조금 더 수면 위로 올라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네거티브 헤리티지보존의 중요성

 시민위원회와 인천시는 인천조병창 병원 건물을 철거하되, 정화작업을 마친 이후 복원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으나 반대하는 이들은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두 사안의 결정적인 차이와 현대적 의미에서 과거 역사적 공간을 보존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지 물었다.

 “크게 복원은 기존 장소에 있던 흔적을 밀어버리고 새로 만드는 방식을, ‘보존은 기존 상태 그대로 남겨두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현재 인천시에서 말하는 복원은 철거 후 토지 정화작업을 마친 뒤 인천조병창과 관련한 자료를 기반으로 다시 만드는 방식을 말합니다. 경복궁과 같이 조선 왕조의 상징적인 장소이자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문화재는 파괴된 것을 복원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조병창은 그냥 그 자체로 두는 것이 맞습니다. 문화재 답사를 가면 우리의 얼과 겨레가 빛나는 장소라는 표현을 종종 듣습니다. 그 관점에서 조병창은 전혀 그런 곳이 아니에요. 일부에서는 조병창을 보며 일제 흉물을 왜 보존하자는 거냐라는 주장을 역시 하지만 20세기 이후 문화유산들은 네거티브 헤리티지다크 헤리티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며 우리에게 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계속 남겨줍니다. 그만큼 진정성이 강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조병창은 80년간 남의 땅이었던 우리 공간입니다. 이곳에 병원을 짓고 고쳐서 연회장과 장교 숙소로 사용하고 미군 기지의 일부가 되는 이런 다양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과거의 역사적 공간을 보존한다는 건 결국 기억의 장소를 보존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집이 없어도, 건축이 없어도 살 수 있다. 우리는 건축이 없어도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집이 없으면 우리는 기억할 수 없다는 영국의 사회비평가 존 러스킨의 말처럼 조병창은 전쟁의 참혹성과 평화의 중요성을 잘 알려주는 살아있는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9월 말에 인천시는 병원 건물 철거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힌 상황이지만, 앞으로 이러한 유산이 계속해서 보존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지속적인 관심이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김연광 기자 dusrhkd99@korea.ac.kr

최서윤 기자 jensy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