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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리빙 포인트: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에게 화내지 않기 본문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장재용
고등학생 시절 나는 화 많은 학생이었다. 학교는 온갖 부조리에 얽매여 있는 공간이었다. 어째서 나는 머리를 빡빡 밀어야 하는지, 왜 내가 공부하고 싶지 않은 밤늦은 시간에 공부를 ‘자율’적으로 해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항상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분노는 선생님들을 향했다. 사소한 일만으로도 나는 쉽게 선생님들께 화를 냈다. 하루는, 야간자율학습을 ‘째기’ 위해 학교 문을 나서는데, 나이 많으신 한문 선생님이 나를 제지하고는 외출증을 보여달라고 하셨다. 내가 수업을 다 듣고 나가겠다는데 왜 그러한 것이 필요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나름대로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심하게 화를 내고 나면 오래도록 속이 아리고 쓰렸다. 섣부른 분노는 나 자신을 갉아먹을 뿐이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나의 평판이 떨어지는 것은 둘째치고, 그렇게 화를 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나는 더욱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정년퇴임을 앞둔 한문 선생님은 부조리한 학교 현실을 바꿀 만한 권한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나의 담임 선생님도, 새로 부임하신 영어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학생들 사이에서 공분의 대상이었던 학생부장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시스템의 최전선에서 ‘오더’를 받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화를 내도, 그 목소리는 시스템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닿지 않는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다른 전략을 사용했다. 그래, 김수영 시인이 말했어.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에게 옹졸하게 욕을 하지 말자. 교육청에 민원을 넣고, 시의원들에게 일일이 이메일을 보냈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어쩌고, 대법원의 감금죄에 대한 판례가 어쩌고 말을 하면서 강제적인 야간자율학습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랬더니 바뀌었다. 야간자율학습은 비로소 진정한 자율학습이 되었다. 억압적인 두발규정은 사문화되었다. 그 대가로 나는 학교 내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선생님으로부터나, 학생들로부터나. 여기까지라면 해피엔딩이다. 그래,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때문에 50원짜리 갈비에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면, 내가 구청 식품과에 신고하면 되겠구나. 투철한 신고 정신이 분노의 대안이 될 테다.
대학교에 들어갔다. 새내기의 캠퍼스 라이프의 후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후에, 외면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들이 서서히 폐부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분의 이름을 감히 불러서는 안 되는 ‘H교수’, ‘A교수’같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대학의 캠퍼스를 신설하는 중대 사안에 학생들의 의견은 배제되고, 신도시 개발에 대학의 이름값이 상표처럼 활용되었다. 대학의 노동자들은 부품처럼 소모되다가 한명 두명 죽어갔다. 고등학생 시절보다 더 거대한 부조리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말단 교직원이나 평교수에게 화를 내어 봐야 당연히 소용이 없을 테다. 그러면 어디에 신고를 해야 하지? 국립대학법인이니 국정감사 때 한 방을 노려야 할까? 그러나 국정감사는 으레 그렇듯 형식적으로 흘러갔고, 총장의 공허한 다짐은 다음 해에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고등학교의 부조리가 사소하게 느껴질 만큼 대학의 부조리는 그야말로 “왕궁의 음탕”이라 할 만했다. 나는 하염없이 작은 개인이었고, 내가 분노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으며, 내가 민원을 제기할 ‘윗선’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학생회’라 부르든 ‘학생사회’라 부르든 ‘꿘충’이라 부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학생총회를 조직하고, 천막농성을 벌이고, 지속적으로 집회를 개최하였다. 5000명의 구성원이 총장 불신임을 선언했고, 2000명이 모인 학생총회에서는 본부점거를 의결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현재 우리가 결코 ‘승리’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부조리의 궤도를 조금이라도 바꾸었다면 그것만으로 수천 명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학부생 시절 나는 대학에서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에게 화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 어쩌면,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이 기름 덩어리 가득한 갈비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경제적 한계선상에 놓인 사람들이 자영업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현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높은 임대료와 부담스러운 카드수수료, 배달플랫폼에 내야만 하는 광고비, 프랜차이즈 가맹비 때문에 그렇게 질 떨어지는 설렁탕을 내놓을 수밖에 없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내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이 아니라 저 기득권이 세운 ‘왕궁의 음탕’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 개인이 분노할 것이 아니라, ‘나’의 분노를 ‘우리’의 분노로 엮어야 하지 않을까.
제발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에게 화내지 말자. 나 개인이 체제의 말단에 있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설렁탕집 주인도 나와 같이 이 체제에 포획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화를 내어봐야 괜히 속만 쓰릴 뿐이다. 분노는 이 부조리한 시스템을 만들어낸 ‘왕궁의 음탕’을 향해야 한다. 그 왕궁이 너무 거대해서 차마 분노할 수 없겠다면, 함께 분노하자. 학생은 학생회로, 노동자는 노동조합으로, 시민은 정당으로 가자. 기성의 단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도 좋다. 분노는 모일수록 힘이 강하다. 분노가 모이면 삶이 달라진다. 오늘의 리빙 포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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