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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대학원 생활과 인류애의 상관관계 본문
대학원 생활과 인류애의 상관관계
어느 대학원생
최근 몇 년 사이 사람들이 쓰는 말 가운데 ‘인류애’라는 단어가 종종 눈에 띈다. 대체로 부정적인 문구를 통해서다. 인류애 상실, 인류애가 바닥을 친다, 인류애 박살 등. 사실 인류애라는 말이 무엇인지 설명하라면 조금 망설여진다. 일단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굉장히 본질적이다. 그런 게 있을 수 있기는 한가? 여기서 또 인문학 전공생답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등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류란, 인간이란 무엇이고, 사랑과 애정은 무엇일까. 단어 각각에 대한 철학적 정의와 거기에 얽힌 역사까지 훑어보자면 끝이 없겠다.
대학원에서 인문학 공부 중인 이들이 여기에 오게 된 계기를 듣게 될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랫동안 좋아한 분야를 전공하고 싶어서 오게 된 이들이 많다. 아니면 사회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굳은 결심을 하고 학교를 찾은 이들도 있다. 이와 달리 나는 작가 한 명이 쓴 논설도 수필도 아닌 글 하나에 반해 전공을 정하고, 교수님 한 분에게 반해서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당시의 나 나름대로는 많은 고민을 거쳤지만, 덜컥 반해서 시작했다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다. 손쉽게 빠져든 애정은 많은 과제를 남겼다. 사명감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뛰어든 연구 분야는 나 말고도 좋은 연구자들이 차고 넘친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주제를 정해서 찾아보면 이미 좋은 선행 연구가 기다리고 있다. 나 없이도 이미 충분한 곳에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내기란 어렵다.
내가 품었던 애정의 가치를 확인할 일보다 시험받는 일이 더 많기도 하다. 마음에 드는 수업은 적고, 듣게 된 수업은 따라가기만으로도 벅차고, 어떻게 구한 조교 자리는 나도 몰랐던 조교 규정 때문에 그만둬야 하고, 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 피곤하시냐는 질문에 돌려줄 말은 딱히 없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마냥 늘어놓을 데는 없다. 대학원 동료들은 늘 나보다 더 바쁘고 열심히 살고 있고, 직장인이 된 친구들은 이해해줄 수 없을뿐더러 그럴 여력도 없기에. 그런 와중에 오며 가며 부딪히게 되는 사람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여유라고는 없다. 점점 지쳐가고 주변 사람들과 나눌 여유는 사라져갔다. 그러다 보면 결국 자신의 진로를 의심하게 된다. 역시 석사 논문 끝나고 다른 일을 찾았어야 했나. 그럴 때는 코로나 탓도 해보았다. 어디든 갈 수가 없었을 거라고.
이렇게 점차 지치는 것을 핑계로 사람들을 최대한 안 만나게 된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류애 상실은 그런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결국 똑같이 실망하게 될 테니 시작 자체를 하지 않고 싶어진다. 코로나는 그럴 때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러다 한껏 바닥을 치고 나서 침대와 하나가 되기 직전, 예전에 잡아둬서 미룰 수 없는 약속을 다녀왔다. 돌아와 보니 기분은 훨씬 나아져 있었다. 날 그토록 지치게 만들던 사람이 내 앞에서 떠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를 받고 왔다. 그래서 해야 할 일들을 최대한 미뤄가면서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매일 해야 할 일 목록 앞에서 머리만 싸매던 때와 달리 마감이 얼마 남지도 않은 시점에 책을 펼쳐 들게 됐다. 잘하려는 생각은 접어두고 완성이라도 하자는 목표로 책을 꺼냈다. 그렇게 펼쳐 든 책에서는 예전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문장에 꽂혀 끝없이 새로운 책을 찾게 된다. 사물함을 금방 채운 뒤 이전에 지나친 논문도 다시 읽는다. 결국 급하게 쓴 글은 좋은 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앞으로 읽어야 할 목록을 잔뜩 적어본 지 오랜만이라 멋대로 만족하고 끝났다.
그래서 이제 전부 회복이 되었느냐고 물어본다면 전혀 아니라고 답하겠다. 아직도 학기가 끝나기 전에 할 일이 산처럼 쌓여있다. 사람들과 만나는 일은 아직 즐겁지만 계속 똑같을 거라 장담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쯤 되면 결국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애정 때문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사람들이 인류애를 상실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게 된 것도 결국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사람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따라서 기대하기 때문이다. 연구에 지치는 것도, 대학원 생활에 지치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 애정에 빠져드는 게 손쉬웠다고 해서, 무엇인가를 계속 좋아하는 게 쉬웠을 리 없다. 애정은 거부할 수도 없으면서 책임은 따른다. 그래서 이제는 시작하지 않으려고 피하려고 해보지만, 사실 모두가 알고 있다. 이미 시작되었고 피할 길은 없다. 그 사실이 때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워도 결국 책임이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은 몇 번이고 부끄럽다. 특히 대학원생에겐 배부른 소리일 때도 많고, 대학원생과 관련된 제도 가운데 개선할 것이 잔뜩인데 애정을 말하는 게 부적절할 때도 있다.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니까 감내하고 버텨라, 그런 결론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참아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니 조금 부끄럽게도 익명으로나마 이렇게 밝혀본다. 다만 나의 이 지긋지긋한 애정이, 그리고 지쳐가는 다른 이들의 애정이 더 이상 다른 이유로 시험받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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