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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우크라이나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통해 본 러시아 프로파간다의 부당성 - 본문

3면/쟁점기획

우크라이나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통해 본 러시아 프로파간다의 부당성 -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4. 3. 13:17

설립한 ‘키예프 루스’에 기원을 두는 나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Київ)는 오랫동안 동슬라브의 정치·경제·문화적 핵심 지역이 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는 많은 이들에게 아직 생소한 나라일 뿐 아니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여전히 러시아 측의 이해관계나 명분에 주로 관심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에 본지는 여러 세기에 걸쳐 통합과 분리를 반복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를 우크라이나 역사를 중심으 로 톺아보는 한편, 이번 러시아 침공에 대한 우크라이나 측의 입장 을 살펴보고자 경상국립대학교 학술연구교수이자 본교 노어노문학과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계속해온 정영주 교수를 만났다.

 

▲ 경상국립대학교 정영주 학술연구교수

 

우크라이나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

 

정영주 교수는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어학으로 석·박사 과정을 마친 후 현재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역의 언어와 문화 연구를 활발하게 이어나가고 있다. 정 교수와 우크라이나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또 전공자의 관점에서 본 우크라이나는 어떤 나라인지 물었다. “우크라이나에는 2002년 교환학생으로 처음 갔었습니다. 당시에는 우크라이나라는 나라를 잘 몰랐고 러시아어를 배우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선택했었습니다. 일단 물가가 싸고 러시아에 비해 훨씬 안전한 환경이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한국인이 거의 없어서 러시아어를 배우기가 좋은 환경이었거든요. 그렇게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크라이나어도 공부하게 됐고, 교환학생을 다녀온 이후 석사에 이어서 박사 과정까지 마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저도 우크라이나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우크라이나에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애정보다는 애증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당시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후진국적 면모’ 가 그대로 남아있었던지라, 인종차별도 굉장히 심하고 행정력도 아주 열악했습니다. 대학원 입학 수속 때는 전화와 메일이 아예 안 돼서 직접 우크라이나의 학교로 가야 했고, 공공연하게 뇌물을 요구하기도 했어요. 새삼스럽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깨닫게 된 건 오히려 요즘입니다. 침공을 둘러싼 여러 가지 요소를 생각하면서 우크라이나를 떠올리다 보니, 제가 정말 우크라이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맥락에서 하나 덧붙이자면, 제가 우크라이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게 됐던 계기는 ‘오렌지 혁명’이었습니다. 겨울에 우크라이나는 4시만 되면 해가 져서 몹시 추워요. 또 당시에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대학생들까지도 각자 청소 등 학업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었죠. 그런데도 어떤 대가도 없이 그 추운 겨울에 지방에서 키이우 까지 9~10시간씩 기차로 이동을 해서 시위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렌지 혁명의 의의를 폄훼하는 쪽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관제 시위’가 아니냐는 식의 공격을 일삼는데, 실제로 미국의 지원이나 그로 말미암은 정치적인 이해관계도 분명 얽혀 있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까지 폄훼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구소련의 지배력 아래 놓여있었는데도 전혀 식지 않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열망이야말로 우크라이나만의 특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로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연장 선상에서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젤렌스키 정부가 선택받은 이유: ‘부패하지 않고 정직한 것’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속해 있던 크림반도를 병합한 후 두 국가의 긴장 관계가 점차 고조되던 상황에서 베테랑 정치인 대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Володимир Зеленський)가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국제사회에 있어서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코미디언 출신 정치 신인인 젤렌스키 정부는 출범과 함께 ‘아마추어 정부’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자질 논란을 겪기도 했지만, 그가 2019년 대선에서 받은 압도적 지지를 상기한다면 우크라이나 국민이 기성 정치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피’를 원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젤렌스키 정부가 가지고 있는 이전 정부와의 차별점은 무엇일까. “정치·사회적인 관점에서 젤렌스키 정부의 특징을 꼽으라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가장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와 닿았던 부분은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했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선 투표 전 설문조사를 할 때 이 후보를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부패하지 않고 정직한 것’이었거든요.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현대사를 살펴보면 부패하지 않은 정부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특히 빅토르 야누코비치(Вктор Януковичі) 대통령의 경우 ‘우크라이나식 부패’의 정점을 보여준 인물이었죠. 야누코비치는 친러 성향의 신흥 재벌을 의미하는 ‘올리가르히(Олігархи)’ 중에서도 가장 유구한 정경유착의 역사를 자랑했던 ‘도네츠크(Донецьк) 클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대통령이었습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부패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냐면, 단적으로 동네에서 작은 치과를 운영하는 의사였던 그의 아들이 임기가 끝나고 나서는 우크라이나의 재산 보유 순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야누코비치처럼 완벽하게 친러 성향이라고 할 수 없었던 페트로 포로셴코(Петро Порошенко) 대통령조차 부패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 국민 입장에서 정권의 부패는 러시아와의 관계와 상관없이 선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던 것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젤렌스키 정부가 작년 봄에 발안한 이른바 ‘반(反) 올리가르히 법’은 국민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리가르히가 가장 까다로운 지점은 이들이 하나같이 거대 미디어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론 형성에 있어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반 올리가르히 법의 골자는 이러한 재벌의 미디어 소유를 여러 방식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물론 올리가르히는 자본 권력과 언론 권력을 모두 소유한 집단으로 오랫동안 우크라이나의 정치를 좌지우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법안 하나가 얼마나 유효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반 올리가르히 법은 러시아-친러 재벌-언론의 유착관 계의 고리를 끊는다는 점에서는 방향성과 의의가 분명한 정책이며, 부패한 특권과의 전쟁이라는 젤렌스키 정부의 정체성과 정당성 또한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실제로 젤렌스키 대통령과 그 정부의 부패 여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겠지만, 2019년의 지지율을 보면 나름대로 그 청렴함을 입증받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크라이나 동서 분화의 역사적 원인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현재까지 복잡다단한 민족 정체성을 담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르강을 경계로 하여 동쪽 지역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친러적 성향을 보이는 반면, 서쪽 지역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며 서유럽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으며, 두 세력의 대립은 2004년 ‘오렌지 혁명’과 2013년 ‘유로마이단 시위’로 비화하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지역적 분화가 발생한 역사적 이유는 무엇인지 물었다. “우크라이나 동쪽 지역이 친러 성향을 보이는 이유는 이미 언론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 것 같으니, 저는 비교적 주목되지 않는 서쪽 지역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동쪽 지역의 친러 성향만큼이나 서쪽 지역의 친 유럽 성향도 명확하고도 유구한 원인이 있는데, 언론에 의해서 서쪽 지역만 별다른 이유도 없이 ‘매국 행위’를 하는 것처럼 매도되는 경향이 있다는 게 안타까워서요. 먼저 우크라이나 서쪽을 보면 체르니치(Чернівці) 주와 자카르파츠카(Закарпатська) 주가 있는데, 이 주에서 국경에 위치한 마을들은 2차대전 당시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강제 합병한 지역입니다. 이 중에서는 원래 헝가리나 루마니아의 영토였던 지역이 대부분이고, 현재도 국경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만 넘어가면 헝가리나 루마니아로 언제든 갈 수 있는 지역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사는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우크라이나 주류에 편입할 생각이 전혀 없이 루마니아나 헝가리로 떠나 정착하는 것을 현실적인 목표로 삼고 있어요. 실제로 루마니아나 헝가리의 정치인들도 매년 이 지역을 방문해서 주민들의 이주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폴란드나 슬로바키아와 맞닿아 있는 지역들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정리하자면 우크라이나 서쪽 지역이 가지고 있는 유럽과의 친밀감이나 동지의식은 단순히 지정학적으로 가까워서가 아니라 명확한 역사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나토(NATO)가 먼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러시아를 압박했으니 침공한다는 논리는 애초에 이러한 복잡한 역사적 사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논리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 서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이 전쟁 피난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환대하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쪽 지역에 대해서도 간단히 한 말씀 드리자면, 여기에서도 단순히 지정학적 원인보다는 경제적인 원인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앞서 말씀드린 올리가르히 들이 대부분 동쪽 지역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고, ‘돈바스 전쟁’의 무대가 됐던 돈바스 지역은 구소련 시절부터 형성됐던 거대한 콤비나트(Комбинат=대규모 산업단지)입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우크라이나의 산업은 경쟁력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고, 이러한 거대한 규모의 공업단지를 유지하려면 러시아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죠.”

 

‘뿌리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오랜 역사를 함께 하며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해왔다.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키예프 루스를 기반으로 한 두 국가의 민족·문화·역사적 뿌리를 강하게 주장하며, 이는 전쟁의 중요한 명분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과연 러시아의 강조만큼이나 두 국가의 민족성 및 문화가 균질하다고 볼 수 있는지, 혹은 그것이 단순히 러시아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정영주 선생의 의견을 물었다. “당연히 민족·문화·역사적인 ‘뿌리’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균질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실제로 1,240년에 몽골에 의해서 키이우가 점령당하고, 모스크바로 중심지가 옮겨가기 전까지는 한 나라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민족적인 계보와 역사적인 연속성이 현대의 국경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민족· 문화·역사의 뿌리를 강조하고, 그것을 ‘신화화’하는 것 자체가 러시아의 프로파간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 뿌리의 중요성에 동의하고, 거기에서부터 이른바 ‘팩트 체크’를 통해 러시아의 논리에 저항하려고 하면 이미 러시아가 마련해놓은 무대에서 싸우게 되는 셈입니다. 물론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역사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명백히 다른 고유성을 가지고 있고,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러시아’라는 이름 자체가 15세기 후반 이반 4세 시기에 가서야 사용됩니다. 그러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게 민족과 문화와 역사의 고유성과 그 뿌리에 집착하게 되는 순간 러시아의 논리에 휘말리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예요. 실제로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나 언론에서 ‘키예프 공국’을 러시아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고, 그런 기초지식을 가진 상태에서 러시아의 논리를 듣다 보면 수긍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과거의 뿌리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현대의 우크라이나가 가지고 있고 만들어나가고 있는 고유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가 섞여서 일종의 방언처럼 사용되고 있는 ‘수르직(Суржик)’이라는 언어를 그 예로 들고 싶은데요. 사실 수르직은 러시아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러시아는 물론이거니와 러시아에 맞서 우크라이나의 고유성을 주장해야 하는 우크라이나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기에 오히려 수르직이 ‘뿌리의 신화’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회색지대이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복잡한 역사가 만들어낸 고유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수르직에 대한 이러한 견해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학자들이나 국민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르직은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앞선 질문에서도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동쪽은 친러,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서쪽은 친 유럽’이라는 언어에 의한 이분법이 언급되었는데요. 저는 이러한 수르직의 존재야말로, 러시아가 특히 주장하는 ‘친러=역사적 정당성/친 유럽=매국’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영서 기자 youngseo516@naver.com

■ 김연광 기자 dusrhkd99@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