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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재현의 체계’로서의 오리엔탈리즘과 에드워드 사이드 본문
‘재현의 체계’로서의 오리엔탈리즘과 에드워드 사이드
- Edward Said, ‘Introduction,’ in Orientalism (London: Penguin, 2003), 1-28.
염동규
흔히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의 원조처럼 거론되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한국에서는 그렇게까지 큰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던 듯하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식민지’ 경험은 사이드가 이 책에서 전제하는 동방(the Orient)과 서방(the Occident)의 구분선에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는 데다가 한국어 번역에도 문제가 많으니까 말이다. 사실 한국어판(박홍규 역)은 상례에서 벗어난 역자의 지나친 개입(이것은 전체적으로 사이드를 무모한 반제국주의 투사처럼 보이게 만들거나, 맑스를 포함한 오리엔탈리스트들에 대해 사이드가 가지고 있던 양가적인 견해를 보지 못하게 한다)도 문제지만 푸코적인 통찰에 일정 부분 의존하는 사이드의 작업에 대해 역자가 별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도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리엔탈리즘의 한국어 번역본이 사이드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이드가 원래 고려했던 책의 제목이 “Orientalizing the Orient”(동방을 ‘동방’화하기)였다는 사실(T. Brennan, 2021)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오리엔탈리즘은 ‘재현된 것으로서의 동방’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대략 18세기 말 이후 제국주의에 의한 동방의 정치경제적 지배가 본격화되면서 이와 나란히 형성된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인들(주로 영국과 프랑스에 한정된다)이 동방을 이해하는 인식적 틀, 그리고 이런 인식적 틀을 생산한 관료제, 제도, 학문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히 담론적 형성물, 관념과 같은 비물질적인 차원을 지시하지 않고 제국주의에 의한 동방 지배, 착취의 실질적 차원을 함께 다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리엔탈리즘이 추구하는 작업이 ‘실제의 동방’과 ‘허구적인 담론으로서의 동방’을 구분한 뒤, ‘전자를 후자로써 희생시킨 서양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어판을 포함해서 사이드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오리엔탈리즘을 이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경향이 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문제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견지하면서도, 사이드가 이 책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작업은 오리엔탈리즘과 ‘실제의 동방’ 사이의 대응 관계를 넘어서는 차원에 위치한 오리엔탈리즘 담론, 그것의 ‘만들어진’ 일관성이라는 문제였으므로(따라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연구가 ‘동방’에 대해서보다는 그들 자신, 즉 ‘서방’에 대해 더 많이 알려준다고 말한다), 오리엔탈리즘 담론을 ‘허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사이드에 대한 오해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이드를 ‘포스트 모더니스트’라고 비판하는 논의 역시 초점을 잃은 것이다. 사이드가 다룬다는 ‘재현’의 문제가 ‘사실’과 ‘허구’의 전통적 경계를 의문시하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사이드에게 있어 ‘사실’이란 담론의 ‘매개’를 ‘거쳐서’ ‘다시-나타난다(재현(再現); ‘re’presentation)’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절대적으로 현전하는 사실’과 ‘전혀 현전(존재)하지 않는 허구’라는 이분법을 경계하고 ‘사실’의 존재 방식에 대한 통념을 복잡화한 것으로 이해되어야지, 세상에 ‘사실’ 같은 건 없으니 모두가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개똥철학으로 이해되면 안 된다. 사이드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이런 맥락에서 포스트구조주의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형성, 발전한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의 ‘시조’가 사이드 자신이라는 세간의 이해에 대해 사이드는 거리를 두었다), 다소 무리가 되는 수준(정체성 정치에 가까운)으로까지 스스로의 텍스트를 ‘곡해’에 내맡겨버릴 정도로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정치적 목적에 헌신적이었다. 비록 파키스탄, 아랍 맑시스트들(대표적으로 Aijaz Ahmad와 Al-Azm 등)과 같은 사이드의 반대자들에게 이 점이 이해되지는 못했지만 ‘동방’에 대한 ‘서방’의 제국주의 지배라는 역사적 ‘사실’은 단순히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실로서 인식하게 해주는 재현적 틀(담론, 매체)의 생산 속에 위치한 것으로서 존재했다는 점은 오리엔탈리즘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논점이 될 것이다.
사실 ‘재현’, ‘담론’과 같은 방법론적 용어들은 탈식민이론의 형성, 발전, 분화에서 큰 중요성을 갖고 있다. 키야 강굴리(Keya Ganguly)나 티모시 브레넌(Timothy Brennan)은 사이드 사유의 좌파-헤겔리안적 궤적을 면밀히 살핌으로써 사이드가 말한 재현과 담론의 문제가 푸코의 그것과는 엄연히 달랐음을 지적한다.(강굴리의 경우엔 독일어 Darstellung이야 말로 사이드가 말한 ‘재현’의 본뜻에 가깝다고 말하며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에서 재현 문제가 전반적으로 의미화(signification) 쪽으로 편향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거칠게 말해 푸코적인 용법에서 재현과 담론의 문제는 ‘착취’의 문제, 혹은 재현의 ‘물질성’이라는 문제를 도외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던 반면, 사이드에게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재현’의 문제를 사고하는 방식은 (강굴리가 사실상 부당하게 푸코와 겹쳐놓는) 가야트리 스피박에게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했다. 강굴리와는 또 다르게, 스피박은 맑스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사용되는 독일어 동사 vertreten과 darstellen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서발턴 문제에 있어 ‘재현’이 단순하게 사고될 수 없음을 치밀하게 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탈식민이론을 잘 연구하려면 사이드를 포함한 이 모든 논자들에게 있어서 탈식민의 문제는 정치경제적 지배, 착취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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