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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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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와 내기: Vertretung과 Darstellung의 다이나믹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5. 4. 23:44

용기와 내기: Vertretung과 Darstellung의 다이나믹

 

염동규 문학평론가

 

 

- Spivak, Gayatri Chakravorty, “Can the Subaltern Speak?” in Morris, Rosalind ed. Can the Subaltern Speak?: Reflections on the History of an Idea,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21-78.

 

 

굉장한 글이다. 60페이지 남짓 되는 짧은 분량 안에 스피박은 1)푸코와 들뢰즈 같은 유럽 지식인들이 그들의 존중할 만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왜 서발턴 문제에 대한 논의의 수준에서는 터무니없을 만치 나이브한 모습을 보여주는가에 대한 비평, 2)‘경제주의’, ‘환원주의’ 등으로 기각되어버리기만 했던 맑스주의의 문제틀을 어떤 이유로, 어떻게 부활시킬 수 있는가(그러나 또 어떤 점에서 그것은 가부장주의적 오류를 만들어내는가) 하는 논점, 3)서발턴 스터디스 그룹의 라나지트 구하의 논의가 갖는 의의와 한계, 4)어째서 ‘서발턴 여성’의 목소리가 적절히 등기될 수 있는 기입 장소들을 갖지 못하는가(이에 관해서는 스피박 자신의 논의뿐만 아니라 S.Shetty & E.J. Bellamy(2000) 또한 볼 만하다) 등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펼쳐놓고 있다.

많은 주제가 복잡하고 흥미롭게 전개되어 있는 글이므로, 이 서평에서는 각각의 논점들을 요약하기보다 내 관점에서 보기에 모든 논점들을 통어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스피박의 재현(representation) 개념에 대해 논의하면서 연관된 논점들을 펼쳐놓아 보려고 한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스피박은 맑스의 「브뤼메르 18일」을 경유하여 representation을 독일어 Vertretung과 Darstellung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영어로도 그렇지만 프랑스어에도 이 두 가지를 구분할 만한 적절한 단어가 없으므로 Vertretung으로서의 재현과 Darstellung으로서의 재현을 뒤섞어 놓기 쉬운데, 스피박은 1)둘을 나누어 고찰하면서도, 2)둘이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하는 동시에, 3)둘이 함께 고려되지 않았을 때 어떤 문제점들이 초래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지적한다.

일단 스피박은 전자를 정치적 ‘대의/대리(代議/Speaking for/representation/proxy)’의 차원에, 후자를 예술적/철학적인 의미에서의 ‘표현(다시-드러냄/re-presentation/subject-predication/description/portrait)’의 차원에 배속시킨다.(그래서 후자의 경우엔 비유 형상은 물론이고 객관적 경제 상황에 대한 기술 역시 포괄할 수 있다) 그런 뒤, 스피박은 맑스의 ‘계급’ 개념과 「브뤼메르 18일」에서 분할지 농민들이 루이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뽑는 사태에 대한 논의를 통해 맑스가 Vertretung과 Darstellung 사이의 다이나믹을 포착했다고 주장한다. 즉, 프랑스 제2공화국 시기의 분할지 농민들이 즉자적으로는 계급을 형성한 셈이지만, 이해관계의 동일성/정체성에 따라 공동체의 감각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성은’을 내려줄 주인을 선출하게 되는 이 상황이 바로 Vertretung과 Darstellung의 다이나믹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이것은 즉자적인 의미에서의 계급을 ‘배반’하는 투표라는 점에서, ‘대의’와 ‘대체’를 함께 의미하는 Vertreten/Vertretung으로 지시될 수 있다. (분할지 농민들의 선택에서 나타나는 ‘간극’)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분할지 농민들이 루이 보나파르트를 선택한다는 것은, 루이 보나파르트가 그들의 삶에 대한 적절한 ‘표현’(Darstellung)으로 떠올랐음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스피박은 이렇게 말한다: “Vertretung으로서의 representation이라는 사건이 마치 Darstellung처럼 작동한다. 기술적인(descriptive) 의미에서의 계급 형성과 변형적인(transformative) 의미에서의 계급 비형성의 간극 사이에 Darstellung이 자리하면서 말이다.” 사회적 현실 속에서는 Vertretung과 Darstellung이 차이-속의-동일성(identity-in-difference)을 이루며 다이나믹을 형성하므로, 반드시 이 둘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스피박의 요점이다. 따라서 푸코와 들뢰즈처럼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며 ‘재현 없이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을 적절하게 기술해야 할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자(Darstellung의 포기; 국제적 노동 분업, 금융세계화 등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천착의 포기), 서발턴을 위해 말할 책임 또한 방기하는 것(Vertretung의 포기; 유럽적 대문자 주체의 은밀한 복권)이다.

나는 스피박의 이 논문을 읽으면서 “...는 말할 수 있다”며 나이브하게 말하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의 두 가지 사례를 떠올렸다. 하나는 ‘청년’에게 한자리 하게 해주면 청년이 알아서 주체가 되어 청년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는 나이브한 사고방식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시간이 꽤 지나긴 했으나) 국문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소위 ‘문화연구’가 소재주의로 경사되어 가는 상황에 대한 박헌호(2010)의 우려 섞인 진단이었다.(“그 자체로 발언하는 ‘자료’라니! (...) 특정한 시대의 에피스테메 안에서 이루어진 글(자료)이 관념의 영토를 통과하지 않은 ‘날 것’일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너무나 소박한 것이 아닌가?”) 스피박을 빌어 다시 질문해보자. ‘청년’에게 한 자리 내어주면 만사형통이라는 나이브한 믿음은 어떤 대문자 주체를 복권시키는가?(국민?) ‘자료’가 스스로 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떤 대문자 주체를 복권시키는가?(민족 문학?) 

결국 이 모든 물음들은 ‘말’이라는 것의 사회경제적 조건, ‘말’이라는 것의 정치적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스피박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도 이것이다. 즉 ‘말’을 둘러싸고, 그것을 생산하는 조건들에 대한 실천적 탐문 없는 선언만으로는 대문자 주체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점 말이다. 그러나 ‘조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탐문이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학제(discipline) 간의 경계를 횡단하려는 ‘용기’를, 그런 횡단 속에 연구자의 실존을 거는 ‘내기’(wager/opening)를 의미하는 것이니 말이다.(사실 스피박은 이 글 곳곳에서 자신이 감수하는 ‘위험’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어쩌면, ‘용기’와 ‘내기’를 위해, 개개인의 담력만이 아니라 오늘날 연구자들을 둘러싼 ‘연구 환경’의 변화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또한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덧붙여두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