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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자유주의 딜레마’를 너머 본문
도서: 마이클 하워드, 안두환 옮김, 전쟁과 자유주의 양심, 글항아리, 2018.
제목 : ‘자유주의 딜레마’를 너머
백승덕, 징병문제연구소 ‘더 나은 헌신’ 연구활동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실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전쟁’이다. 단지 러시아를 규탄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우크라니아 젤렌스키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적은 패배해야 하며, 오직 그것만이 민주주의를 위한 안보의 기반이 될 수 있다”며 러시아가 패배해야만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밝혔을 때, 자유와 민주주의는 이 전쟁의 핵심이 되었다.
최근 젤렌스키 정부는 우크라이나 평화운동가를 ‘러시아 침공 정당화’라는 명목으로 기소했다. 전쟁을 멈추고 협상을 진행하라고 요구한 성명서가 문제였다. 러시아 침공 이전부터 우크라이나에서 병역거부운동 등을 벌여왔던 평화주의자가 제기할 법한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평화운동가의 아파트를 영장 없이 압수수색했다.
젤렌스키가 내세운 자유와 민주주의는 거짓일까. 러시아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삶의 터전을 침범하고 이웃을 살육한 전쟁범죄를 묻기 전까지 전쟁을 멈춰선 안 된다는 것이다. 당장 전쟁을 멈추고 대화를 시작하라는 요구는 <경향신문> 박은하 기자의 지적처럼 “‘존엄한 사회’, ‘품위 있는 삶’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열망까지 주저앉혀야만 가능한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로 보면 전쟁과 협상 중 택일은 불가능하다.
마이클 하워드의 <전쟁과 자유주의 양심>은 자유주의의 이처럼 모순되고 난처한 입장의 계보를 역사적으로 분석한다. 이 책은 1977년 열린 강의에 기초했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다루진 않는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가 온전히 충족된다면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 혹은 전쟁을 감수하더라도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현실에 구현되었을 때 어떤 파열음을 냈는지 살펴보는 작업은 오늘날 평화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이 다루는 ‘자유주의 딜레마’는 16세기에서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진다. 오랜 기간 딜레마가 풀리기 어려웠던 건 자유주의에 내재된 모순 때문이다. 한편으로 자유주의는 이성이 온전히 발휘된다면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살인을 해선 안 된다는 칸트의 정언명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자유가 존립하기 어려운 상황에선 전쟁을 하는 것이 이성적이라는 점도 인정한다. 어떤 경우엔 전쟁을 최대한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유주의가 용인할 수 없는 불의를 묵인하는 전략도 합리적이라고 수용한다.
자유와 전쟁의 관계가 복잡하니 자유주의자들의 입장 또한 일관되기 어렵다. 그러나 저자는 자유주의자들이 전쟁을 이성의 역사에서 일탈한 상태로 본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성의 정상궤도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꾸준히 노력해왔다. 저자는 이와 같은 노력을 추동하는 것이 ‘자유주의 양심’이라고 말한다. 양심이란 마음속에 품은 신념과 태도에 비추어 세계를 변혁하고자 행동하도록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지배계급만이 전쟁을 원하며, ‘인민(people)’은 양심과 언론의 자유만 보장된다면 평화를 바랄 것이라 전망했다. 18세기 들어 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사상이 되면서 전쟁이 귀족의 이익다툼에 불과하여 국가의 이익을 해친다는 인식 또한 통념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이 의견과 상품을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이 대세가 된 것이다.
게다가 19세기에 들어서면 민족자결권이 자유주의 평화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국가 간 평화는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국민국가들이 각자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질 때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국제연합과 같은 집단안보체제 역시 민족자결권의 기초 위에서 파생된 평화구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자유주의자들의 기대를 배신했다. 프랑스혁명에 가담한 인민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주변국들과 전쟁을 이어갔다. 민족 간의 전쟁은 호전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확산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된 자유무역이 만들어낸 국제적 이익네트워크도 국민국가 간 총력전 양상으로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을 막아내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주의 딜레마’가 비극적으로 드러났던 시기였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인민은 자유주의자들의 예상과 달리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서 파시스트를 지도자로 선출하고 전쟁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역사는 파시즘의 패배로 기록한다. 하지만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부정하는 파시즘의 출현 앞에 자유주의 양심은 혼동과 위선을 드러냈다. 국제규범을 강제할 것인가,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협상할 것인가. 원칙을 두고 갈등하는 사이에 전쟁은 전에 없는 규모로 커졌다.
이 책이 분석하는 자유주의 양심의 역사는 그래서 실패담에 가깝다. 저자는 당대의 냉전을 두고 자유주의자들이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음을 안타까워 한다. 오늘날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 역시 러시아의 침공을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전쟁의 주무대인 돈바스 지역에서 분리주의자들이 주도한 주민투표는 러시아 합병으로 결론을 내놓았다. 자유주의 원칙은 이 결론의 정당성을 쉽게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복잡한 현실 앞에서 집단안보 역시 가치보다 이익동맹의 논리가 지배한다.
그럼에도 평화는 구축되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평화를 만드는 일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성과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 국제사회가 그간 이뤄낸 진보는 상당 부분 자유주의 양심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 역시 이러한 노력 덕분에 오늘날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받게 되었다. 국제규범을 따르는 국제사회가 구성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비록 선언적인 수준에 머문다고 해도 말이다. ‘자유주의 딜레마’를 넘어설 방법도 지난 역사 속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것, 여기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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