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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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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홍범도에게 권총을 건넨 이유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0. 5. 00:20

레닌이 홍범도에게 권총을 건넨 이유

 

백승덕(징병문제연구소 ‘더 나은 헌신 연구활동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사회주의와 전쟁, 아고라, 2017.

 

 

 

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 장군 흉상을 이전하겠다고 발표해서 논란이다. 홍범도의 흉상을 이전해야 한다는 측에선 소련 공산당 입당 이력을 문제 삼았다. 반면, 공산당 입당이 진심과 다른 것이기에 문제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가 일자무식이라거나 연금 받으려고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이 역시 공감하긴 어렵다. 홍범도가 생계를 위해서 시류에 편승한 위인이라는 말인가?

홍범도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을 면담한 뒤 권총을 받았고 몇 해 뒤엔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홍범도는 레닌이 건넨 권총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와 전쟁󰡕은 레닌이 건넨 권총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준다.

이 책엔 레닌이 러시아 혁명 직전이던 1915년에 전쟁, 평화, 민족자결권에 대해 썼던 소논문들이 실렸다.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화시켜라"라는 구호는 레닌이 이 책을 통해 일관되게 요구하는 사회주의자의 의무다. 레닌은 당대의 전쟁이 제국주의에 의해 발발했다고 분석한다.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독점 자본이 자기 확장을 위해서 외부로 눈을 돌린 결과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요구하는 사회의 병영화와 애국주의는 노동자 운동을 와해시켜서 계급투쟁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평화운동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존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건 그러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평화론은 혁명을 위한 폭력 사용을 부정하지 않는다. 레닌은 내란, 즉 억압계급에 대항하여 피억압계급이 수행하는 전쟁, 노예 소유주에 대항하여 노예가 수행하는 전쟁, 지주에 대항하여 농노가 수행하는 전쟁,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임금노동자가 수행하는 전쟁 등을 적법하고 진보적이며 필연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닌은 평화에 대한 요구가 혁명 없이 현상유지 차원에 머문다면 속물적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레닌이 천명했던 민족자결권을 위한 투쟁도 이러한 혁명적 내전의 연장선이다. 그는 민족자결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제국주의에 맞선 국제 사회주의 혁명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아일랜드 지배가 영국의 지주제를 유지하게 만드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레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해방 문제가 더욱 첨예해졌다고 진단한다. 고도화된 자본주의는 극소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대다수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서 억압하고 착취하도록 요구하고, 그에 따라 피억압 민족의 저항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레닌은 피억압 민족의 자기결정권 요구가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가지기 어렵지만 국경을 넘어선 자본의 관계망에서 약한 고리를 건드리기에 세계혁명으로 나아가는 연쇄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레닌의 민족자결론은 피억압 민족의 자기결정권을 세계혁명의 기본요소로 보았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평화론에서 말하는 민족자결권과 다르다. 자유주의 평화론은 모든 국민국가가 각자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면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레닌에게 그와 같은 현상유지는 오로지 지배관계를 반영한 것이기에 부정의하다. 그에 따르면 착취당하는 계급과 억압받는 민족의 투쟁 없이 평화는 유지되기 어렵다.

레닌의 민족자결론은 실로 호소력이 있었다. 계급 착취와 민족 억압과 같은 구조적 폭력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평화론과 뚜렷하게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의 우드로 윌슨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민족자결권을 주창했지만 그것은 오직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윌슨의 주도로 조직된 국제연맹의 헌장에서도 민족자결권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

식민지민들, 특히 홍범도처럼 무장투쟁을 하는 독립군에겐 혁명적 내전의 동지라고 부르는 호명이 반갑게 가닿았을 것이다. 게다가 청산리와 봉오동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군의 포위가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레닌의 민족자결론은 독립군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육사 교장을 역임했던 김홍일 장군 역시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赤軍)과 협동작전을 펼치며 반혁명군에 맞서 싸웠던 이유도 당시 정세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은 내전이 혁명적으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내전은 피억압 민족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혁명에 대한 관점의 차이와 권력투쟁 때문에 발발한다. 게다가 소련이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를 전차로 진압하거나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했던 역사들을 돌이켜보면 혁명적 내전이라는 개념이 사회주의 혁명을 지킨다는 이유로 다른 민족의 자기결정권을 억압할 때도 전유될 수 있다.

레닌이 주창했던 혁명적 내전은 민족문제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 폭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거나 심지어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개념으로 전락할 때가 많았다. 오늘날 평화연구에서 좌파의 도구주의적 폭력 옹호론을 비판할 때 레닌의 혁명적 내전 개념을 언급하는 것도 대항 폭력이 처참한 결과로 이어졌던 역사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유주의 평화론이 현상유지에 머문다는 문제의식 또한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불평등과 차별, 지배와 억압과 같은 구조적 폭력에 맞서서 파열음을 내지 않는다면 평화는 레닌의 지적처럼 속물적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의 혁명적 내전과 민족자결론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쉽게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저 받아들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레닌이 건넨 권총은 그것을 문제 삼는 이들의 의도를 넘어서 전쟁과 평화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