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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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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저자와의 대화

애도되지 못한 죽음에 작동하는 숭배와 적대의 정치를 개념화하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9. 2. 14:27

애도되지 못한 죽음에 작동하는 숭배와 적대의 정치를 개념화하다 

천정환, 『숭배 애도 적대 : 자살과 한국의 죽음정치에 대한 7편의 하드보일드 에세이』, 서해문집, 2021.

 

 

Q : 이 책에 담긴 여러 고민들은 2013년 저서인 『자살론』에서부터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한국의 여러 사회 문제를 ‘자살’과 그에 따른 ‘죽음정치’의 관점에서 보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이 관점이 기존에 선생님께서 천착하셨던 문학연구‧문화연구 등과 어떤 주제론‧방법론적 연관관계가 있는지도 여쭙고 싶습니다.

A : 자살은 사회적 현상이며 역사를 지닌 문화적 현상입니다. 그리고 연구를 시작하자 곧 자살이 ‘근대성’과 깊이 맞닿아 있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근대문학·문화사 연구자들이 그러듯 저도 근대 초기의 신문·잡지를 많이 뒤적여봤는데, 1920년대의 신문 사회면을 보면 자살 사건으로 가득합니다. 오늘날과 비슷하게 빈곤과 빚, 가족 갈등, 정신질환 등이 자살의 원인으로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도 사회운동가들, 언론인들 그리고 의학자들도 이런 현상에 주목하여 저마다 많은 해석과 담론을 전개했습니다. 문학가들이나 예술가들도 자살이나 자살생각을 새로운 개인의 실존의 문제로 바라보고 그것을 재현의 체계로 끌어들었습니다.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근대인의 복잡한 내면과 사회의 작용에 대한 발견은 분명 큰 주제가 됐겠죠.

이렇게 관심을 갖고 살펴보니 제가 자살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2000년대 초에는 자살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고, 지금의 한국은 특히 ‘자살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자살 문제가 심각한데도 자살학(suicidology)이 초보 단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책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 자살이라는 현상은 본질적으로 간(間)학문적인 주제이고, 다층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만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저 역시 연구하면서 당연히 사회학·심리학·의학 연구 등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저도 문학‧문화 연구자로서 한국 자살학 연구에 일조했다고 나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작 『자살론』에서는 주로 문헌연구를 통해 전근대로부터의 집단적인 심성(‘마음’)의 변화와, 자살의 사회문화적 언어화·의미화의 방식을 다뤘습니다. 이번 책 『숭배 애도 적대』에서는 자살과 한국정치의 관계를 주로 다루려했습니다. 

 

Q : 이 책에는 ‘애도’와 ‘정동(affects)’이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선생님께서 이 개념들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시는지 간략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한 사람의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는 돌이키지 못하는 이별이고 상실입니다. 그래서 애도는 원론적으로 그 상실을 충분히 제대로 슬퍼하고, 또 죽은 사람을 정당하게 기리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애도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마음과 기억의 한계에 의해 죽음도 서서히 망각됩니다. 그런데 자연사가 아닌, 타살이나 자살과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큰 심리적 타격을 주고 제대로된 애도를 불가능하게 하는 감정 상태에 이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를 ‘멜랑콜리아(melancholia)’라고 부르죠.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사회적 범위로 확장되고 공유되면, 억울한 예기치 않은 죽음을 어떻게 처리하고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가 확장되고, 또 이에 관한 쟁투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의 관계도 재정립됩니다. 그렇게 애도와 죽음이 정치의 문제가 됩니다. ‘애도의 정치’는 쉽게 말해 ‘누군가의 죽음을 얼마나 어떻게 슬퍼하고 어떤 방법으로 기릴 것인가’가 공동체의 문제가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한국사회에는 이와 관련된 정말 많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광주항쟁이나 세월호 참사 뒤의 한국사회를, 그리고 그에 대한 법 제정 과정을 생각해보세요.   

그런 작용은 이성과 논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죽음과 상실의 충격, 죄의식 자체가 ‘마음’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런 마음을 정동이라 부릅니다. 정동이라는 개념은 이제 한국학계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는데 처음에는 ‘감정(感情)’, ‘감응(感應)’ 등으로 번역되기도 했을 만큼 다층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저는 개인 주체의 심리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작용하는 감정의 흐름이라는 의미로 ‘정동’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정동은 이데올로기와 상호작용하며 윤리적 태도를 만드는 집단적 주체의 감정입니다. ‘집단심성’ 혹은 ‘망탈리테’ 개념과 이런 면에서는 통합니다. 그런 작용이 누군가들의 죽음을 처리하면서 집단적 정체성과 공동체를 새로 형성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변화시킵니다. 

 

저자 제공

Q : 앞선 답변해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죽음 혹은 자살은 그 자체로 정의하기 힘든 복잡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어떤 죽음은 적극적 자결로 받아들여져 ‘열사’의 탄생으로 이어지지만, 어떤 죽음은 반(半)강제된 자살로 받아들여져 ‘희생자’의 희생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죽음들을 의미화하는 ‘열사의 정치학’은 무엇이며, 이것이 작동하는 데 있어 ‘숭배’는 어떠한 기제로 개입하는지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최근 MBC 등의 언론이 보도한 성균관대 국문과 80학번 출신의 최동 열사의 죽음과 관련된 기사를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군과 경찰이 전두환 시절에 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을 ‘녹화사업’이라는 것을 통해 프락치로 만들고, 다른 친구들을 경찰에 팔아넘기게 했습니다. 그런 프락치들 자신과 또 프락치 때문에 잡혀간 많은 사람들이 극악한 고문을 받았고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프락치 중 하나가 이번에 윤석열 정권이 무리하게 설치한 경찰국의 초대 경찰국장이 됐다는 것입니다. 지난 8월 7일에 성균관대 민주동문회가 최동 열사 33주기 추모식을 크게 하고 또 재야 시민단체들이 이에 관한 합동 기자회견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열사 정치’의 살아있는 한 모습입니다. 열사는, 죽었어도 죽지 않는 젊은 영혼이자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의 희생자입니다. 한국의 어두운 정치가 그렇게 만듭니다. 이러한 죽음들은 밝혀지지 않은 진상과 죄의식의 정동 속에서 여전히 저승이 아닌 이승에, 또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있습니다. 

‘애도의 정치학’은 훼손당한 가치와 도덕을 다시 세우고 그에 비추어 적합한 삶을 살아왔던 이를 정치적인 순교자로 간주하여 그를 받들게 됩니다. 이를 ‘숭배’라 표현했습니다. 숭배는 이데올로기와 윤리적 태도가 만나 형성되는 태도입니다. 어느 정치 공동체나 그런 숭배 대상자를 갖고 있는데, 간혹 그 대상을 우상화‧미화하는 작용도 나타납니다. 

 

Q : 이 책의 2부에서는 특정 정치인들의 자살을 통해, 정치사회에서 광범위한 애도가 어떻게 발생하고 그것이 어떻게 광범위한 증오(혹은 적대)로 왜곡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 정치의 기형적인 감정구조 혹은 정동구조가 형성되는 과정과 원인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A : 한국 현실정치의 정동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그에 대한 애도의 정치라 생각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왜 죽음에 이르렀으며 그 죽음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를 생각해봅시다. 노무현 정권 당시부터 있어왔던 검찰과의 마찰과, 퇴임 이후 검찰과 이명박 정권의 정치보복은 노무현에 대한 애도를 강력한 감정을 지닌 정치적 힘으로 만들어냈습니다. 한 진영의 죄의식과 증오는 다른 진영의 반작용을 일으켰고, 한국 현실정치 전체가 이 정동의 정치에 연루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거대한 증오와 적대의 정동은 이용해먹기에 좋은 먹잇감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비뚤어진 양당 정치와 검찰개혁 같은 중요한 의제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동원되고 소모돼왔습니다. 본질적 정치의 의제와 정책을 통한 경쟁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촛불 이후에 집권한 문재인 전 대통령도 이 문제를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해서 적폐청산이 마치 정치보복인 것처럼 비춰지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 여파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었으며 박근혜를 감옥에 보냈던 윤석열이 ‘보수’의 후보로 대선에서 승리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죠. 비이성적인 감정의 정치가, 보수 대 진보라는 허울을 쓰고 대통령중심제와 소선구제의 낡은 정치제도 위에서 계속 이어지는 형국입니다.  

 

Q : 1980년대의 노동자‧대학생들부터 2000년대 이후 연예인들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는 수많은 기억될/기억되지 못 할 ‘죽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죽음들이 정당하게 애도되기 위해 그리고 비슷한 모습으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개인적‧사회적인 여러 요소들에 대해,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A : 『자살론』을 썼던 2013년에는 자살에 대한 정부나 사회 전반의 인식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그 변화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사회의 자살 문제에 대한 인식은 개선되었습니다. 자살예방법도 제정되고 자살예방 정책도 다양해졌고 자살학도 더 풍부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질문들에서 말씀드린 문제와 한국사회의 자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책에서 1부는 열사의 정치학, 2부는 현실정치와 정치권의 자살 사건들, 3부는 연예인과 자살예방정책과 연예인의 자살에 대해 다루었지만, 그 공통점은 한국사회의 폭력성과 잔인함입니다. 한국 자본주의의 엄청난 속도와 폭력성, 계급구조의 잔인함, 차별과 불평등의 잔인함과 그것을 부추기는 문화 말입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위태롭습니다. 각자 적절한 마음의 방비책과 대안적인 삶의 자세를 계발하지 못한다면 그 개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살은 특별한 데서가 아니라 우리의 가정‧직장‧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정‧직장‧학교가 돌아가는 원리를 제공하는 젠더구조가, 직장문화와 경제적 불평등이, 그리고 교육체계가 바뀌고 있는지, 혹은 그것들을 바꿀 수 있는지 물어본다면, 누군들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들을 못 바꾸면 자살률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다양한 자살예방정책도 미봉책에 불과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바로 그렇습니다. 문제가 뭔지 알지만, 고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