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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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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저자와의 대화

린위탕의 수용사를 통해 냉전기 문화적 욕망의 단면을 파헤치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6. 3. 23:10

린위탕의 수용사를 통해 냉전기 문화적 욕망의 단면을 파헤치다

왕캉닝(王康寧), 린위탕과 한국: 냉전기 한국 문화지식의 초국가적 이동과 교류, 소명출판, 2022.

 

Q : 먼저 선생님께서 한국문학과 문화사를 전공하시게 된 과정과 배경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냉전이라는 주제와 그 자장 안에서 교류되었던 문화지식의 이동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박사논문의 주제로 설정하시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A : 학부는 중국 난징대학교(南京大學) 한국어학과를 졸업했는데 그때는 문학보다는 한국어를 위주로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중 4학년 때 서울대에서 정년퇴직하신 어느 교수님이 난징대학으로 초빙되셔서 한 학기 동안 문학사수업을 강의하셨던 게 제게는 아주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총망라한 문학사를 가르쳐 주셨는데, 작품을 설명하실 때마다 아이같이 초롱초롱하고 말똥말똥한 눈빛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돌이켜 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문학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들을 통해 한국 문학을 접할 수 있었으니까요. 솔직히 한국문학 자체에 관심을 갖고 이 길을 선택했다기보다는, 한국문학을 전공하신 분들이 공통적으로 제게 주셨던 영감이 있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한국문학이 도대체 무슨 마력이 있기에 다들 저러실까?’라는 궁금증과 설렘을 가지게 만들었던 거죠. 한국에 있는 대학원 중 어디에 진학할까 고민하다가 현재의 지도교수님이신 권보드래 선생님의 연애의 시대를 읽게 됐고, 그렇게 고려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 권 선생님 밑에서 한국문학을 공부하던 시기는 감히 제 인생의 골든타임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제를 찾는 과정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한국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이상, 가능한 중국 대학에서는 연구하기 어려운 주제를 연구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중국 학자들은 주로 식민지시기의 한국문학 연구에 치우쳐 있고 해방 후나 냉전, 그리고 타이완과 관계를 맺었던 작가들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도 섞여 있었겠죠. 그러나 대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공부를 계속 진행하면서 냉전시기의 한중 문인문학 교류는 상식처럼 여겨왔던 단절상태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교집상태임을 알게 됐습니다. 고전문학에서 현대문학, 중화민국부터 타이완, 그리고 중국대륙까지 냉전시기에 한국과 중국은 계속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지적 소통을 이루어 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계속 서로의 무엇인가를 향해 호명하고 소환하려 했던 역사 속에서, 단언컨대 단절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큰 충격을 느껴 석사논문의 주제로 장아이링(張愛玲)과 한국을 선택했고, 그리고 이 문제의식은 6년 뒤 박사논문의 주제인 린위탕(林語堂)과 한국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Q : 이 책은 린위탕(林語堂)’이라는 인물과 그 수용 양상을 중심으로 한국의 근대에서부터 냉전기까지를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위탕 세계, 세계 위탕이라는 슬로건까지 만들어냈던 린위탕이 어떤 인물이며, 그가 한국중국일본타이완 등지에서 가지는 문화사적 위상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린위탕(林語堂, 18951976)은 중국 푸젠(福建)성 장저우(漳州)현 판자이(阪仔)의 기독교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 미션계 초중학교를 거쳐 당시 동양의 하버드대학으로 불린 상하이의 미션스쿨 세인트존스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하버드대학과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각각 비교문학 석사학위,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린위탕 하면 자연스럽게 세계의 지성’, ‘서문명의 교량’, ‘동양의 유머대사(幽黙大師)’등과 같은 타이틀이 떠오릅니다. 한때 루쉰(魯迅), 후스(胡適)를 비롯한 동시대 중국 지식인 그 누구보다도 세계적인 명망이 높았으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대대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죠. 서론에서 소개했듯이 린위탕은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을 창작했고, 영 이중언어창작을 모색했을 뿐 아니라, 언어학자영어교육가중국어 타자기 발명가유네스코 고어문자부 부장(Director of Arts and Letters Division)싱가포르의 남양대학교(南洋大學校) 초대 총장타이완 펜본부 회장국제펜클럽 부회장 등 수많은 직함직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린위탕의 세계성(世界性)이나 세계적 영향력을 이야기하면 흔히 서양이라는 범주에 국한하여 얘기하고, 그가 한국일본타이완 등 동양 국가 및 지역에서도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는 사실이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린위탕의 󰡔My Country and My People, Moment in Peking󰡕(1938) 등과 같은 작품이 빠른 속도로 번역소개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생활의 발견󰡕(1954)을 비롯하여, 󰡔중국전기소설집󰡕(1955), 󰡔마른 잎은 굴러도 지는 살아 있다󰡕(1956), 󰡔폭풍 속의 나뭇잎󰡕(1956), 󰡔임어당 수필집󰡕(1957), 󰡔무관심󰡕(1958), 󰡔붉은 대문󰡕(1959) 등 수필소설, 창작번역을 아울러 린위탕의 다양한 작품이 연이어 출간되었고 1968년과 1970년 무렵에 린위탕의 연속 방한을 계기로 한국 독서 출판계에서 대대적인 린위탕 열풍’, 특히 󰡔생활의 발견󰡕 출판 붐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1966년 린위탕이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타이완에 정착한 이후에는 계속 문학 활동을 하면서도, 끊임없는 연설 초청 때문에 매주 공무를 수행하듯이온갖 강연에 나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당시 타이완에서는 린위탕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역시 만만치 않았죠. 린위탕이 한국에서 독서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비슷한 시기에 오히려 타이완에서는 사범사건(思凡風波)’으로 인해 사회 각계로부터 냉대를 받고 맹공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여러모로 문화사에 흥미로운 현상들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 왕캉닝( 王康寧 )

Q : 린위탕은 일제식민지시기였던 1930년대부터 한국에 수용되었지만, 해방기를 거쳐 이른바 개발독재기로 구분되는 1960~70년대에 이르러서야 린위탕 열풍이 일어났습니다. 이렇듯 린위탕의 수용 과정에 있어 린위탕의 방한을 통한 직접 교류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겼던 박정희 정권의 욕망과 냉전의 정치적 역학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A : 린위탕의 방한은 린위탕의 한국 수용사에 있어 그 내실을 더 풍요롭게 채워 주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겹겹의 균열을 산출해 낸 큰 변수였습니다. 방한이 없었으면 린위탕은 그저 다소 평면적인 이미지의 지식인으로 무난하게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죠. 린위탕의 방한이 마치 기폭제처럼 일시에 뜨거운 사회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지만, 저로서는 린위탕의 수용사에 있어 방한이 가져오는 소위 극적 마케팅 효과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고 싶지는 않은 입장입니다. 린위탕이 196070년대에 한국에서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방한 이전부터 그의 작품이 이미 다수 번역 출판되었고 또 한국 대중의 애독서 리스트에 줄곧 올라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방한이 무산되었더라도 1960년대의 인생론에세이의 열기가 이어지는 한, 󰡔생활의 발견󰡕을 비롯한 그의 에세이는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소비되었을 공산이 크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린위탕의 방한과 더불어 그와 한국의 대중지식인언론기관국가권력 등 다양한 주체들과의 직접 교류를 중대한 디딤돌이나 기폭제가 아니라, 한국 독서계와의 간접교류의 연장선에서 취급하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린위탕의 방한을 또 하나의 완전하고 입체적인 현장이자 텍스트로 보고, 그것을 샅샅이 재조명함으로써 방한 자체가 가지고 있거나 혹은 생성해내는 의미들을 발굴하고자 했습니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조국 근대화’, ‘민족중흥의 길에 향해 한창 속도를 내고 있었고,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리기 위해 각종 문화재 관리 사업을 전개하며, ‘평화 한국이라는 국제 이미지를 의식적으로 연출하려던 박정희 정권에 있어, 동양문화의 중요성과 동양인의 유머철학(평화철학)을 세계적으로 피력하는 린위탕이라는 아이콘은 딱 이용하기 좋은 방편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린위탕의 방한이 순조롭게 성사될 수 있었고요.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정치나 역사는 결코 욕망-욕망의 실현/좌절이라는 단순한 구조로 흘러가지 않고 항상 욕망과 또 다른 욕망()과의 만남, 공모, 또는 길항, 충돌과 같은 복잡한 패턴을 따른다는 점입니다. 린위탕 역시 박정희정부 못지않게 치열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려는 주체였습니다. 한국 대중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렇기 때문에 린위탕은 1968년에 동양사상+근대화라는 맞춤형연설을 계획하게 되고, 1970년에 유머 강연을 하기 위해 재차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두 차례의 방한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양한 주체들의 욕망의 공모와 길항 현상이 포착되었습니다. 다만 이 수많은 욕망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것에 대해 여기서 다 말씀드릴 수는 없기에, 궁금하신 독자분들께서는 본문으로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Q : 선생님께서는 린위탕의 수용에 있어 거시적정치적 담론이나 관점뿐 아니라,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를 위시한 수용미학이나 독서사의 관점 또한 강조하고 계십니다. 당대 한국의 독자들이 린위탕에게 걸었던 기대(protention 혹은 retention)’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드러냈던 소통의 유효지대균열지대는 무엇이었는지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A : 사실 이 책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앞 질문과 연결해서 범위를 좀 좁혀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960~1970년대의 린위탕 독서사의 한복판에는 무엇보다 당시 압도적으로 출판된 생활의 발견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텍스트로서의 린위탕은 당시의 평가를 차용하자면 서양적 교양을 주무기로 동양의 지혜를 갈파하는 생활의 철학인이라는 이미지였습니다. 그리고 린위탕 역시 1968년에 있었던 세계대학총장회의에서 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습니다. 따라서 한국 대중은 린위탕이 시민회관 강연회에서도 그들에게 동양정신의 중요성과 함께 빈둥빈둥 지내는일상의 행복학을 강연해 주길 ()의식적으로 예상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강연회에서는 그러한 린위탕의 이미지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 대신에 가난 속에서 스스로 창조하는 기회를 찾아”, “전진, 전진, 전진하라며 근대화 구호를 외치는 투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한국 대중(독자)에게 줄곧 만만디”, 즉 느림- 멈춤의 미학을 피력해 왔던 린위탕은 뜬금없이 콰이콰이디”, 즉 빨리빨리-속도의 미학을 옹호한 것이었죠. 물론 린위탕의 근대화론은 박정희정부의 관변담론과 그 내포가 다릅니다. 그는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근대화를 주장했고 또 국가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궁극적 목표를 국민 개개인, 즉 민생(民生)에 귀착시켰습니다. 그러나 린위탕이 전달하려는 메시지, 한국 청중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과연 정확하게 전달될 수가 있었을까요? 한국 청중들에게는 일상에서 수백 번이나 보고 들었던 그 근대화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박정희정권의 관변 프로파간다와 똑같이 들렸을 공산이 큽니다. 이것이야말로 독자청중들의 마음속에서 발생했던 근대화-박정희 정권-린위탕에 대한 소통의 균열지대였고, 이런 수용상의 균열이야말로 문화의 역사가 훨씬 더 재미있어지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영서 기자 youngseo516@naver.com